소설_당신의 목소리 (3)

by 지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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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원래 순수했고, 꿈이 많았고, 세상을 잘 믿었던 여자였습니다. 고시원에 살았지만, 미용실에서 최저 시급으로 계산된 월급, 고작 80여 만 원을 받으면서도 그랬습니다. 이렇게 엄마가 되는 것을 알기 전까지, 가진 것 없는 인생이지만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할 때가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외로움이라는 것을 익숙하게 옷처럼 두르고 있으면 그럭저럭 돈을 쓰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헤어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고, 그 전에 전세금을 모아야 했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함께 저녁을 먹고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모든 것이 당신에게는 불필요한 일들이었습니다. 고시원에서 산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 동료들과 함께 퇴근하는 날은 먼 길을 빙 둘러 왔습니다. 동정이 싫어 부모도 없이 혼자라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당신에 대해 알려고 드는 질문들에 적당히 한 두 차례 얼버무리면 동정심이나 연민, 쓸 데 없는 관심에서 벗어 날 수 있었습니다. 고시원 앞 편의점에서 묶음 할인으로 벌려진 컵라면을 사서 쟁여 두고, 고시원에서 공짜로 주는 밥을 컵라면 국물에 말아 먹으면 한 달에 30만 원 정도는 저금할 수 있었습니다.


말은 없었지만 성실하고 손이 빠른 당신은 직장에서 예쁨을 받았습니다. 잘린 머리카락을 쓸고 청소를 하던 일에서 수 개 월이 지나 손님의 머리를 감기고 말릴 수 있는 일까지 하게 되었고 이제는 염색약을 손에 묻힐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빗자루를 들고 분주하던 시절에도 디자이너들의 화려한 가위질을, 손님을 대하는 능숙한 매너를 늘 훔쳐보았습니다. 잘 다려진 셔츠를 입고 오른쪽 가슴에 디자이너 김수인이라는 이름표를 달 수 있는 날을 꿈꾸었지요. 어느덧 손에 염색약이 까맣게 물들고 하루 종일 서 있는 다리에 울뚝불뚝 근육이 생겨 다리가 저리고 아팠지만 그래도 디자이너가 되면 월급이 두 배는 될 수 있었고, 더 많이 모을 수 있었습니다. 월급이 오르면 어떤 적금에 가입할까? 은행을 지날 때마다 벽에 붙은 전단지를 눈 여겨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고시원의 손바닥만 한 창. 그때도 당신은 창문을 좋아했나 봅니다. 창문이 있으면 5만원이나 돈을 더 내야 했는데도 알뜰한 당신이 그 방을 택했던 것을 보면. 두 손을 가득 펴면 너무 쉽게 가려지고 마는 자그마한 창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창문으로 D역 인근의 화려하게 번쩍이는 네온사인들을 볼 수 있었고, 도시를 감싸고 있는 아파트 단지의 아른거리는 불빛들도 내다볼 수 있었습니다. 아파트 값이 얼마인지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신은 그저 맑은 여자였습니다. 가끔은 손을 뻗어 가물거리는 아파트 불빛을 어루만지곤 했습니다. 저렇게 불빛이 많은데, 설마 내가 들어갈 곳 하나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부서져라 일하면, 내 몸 하나 죽어라 고생하면 언젠가는 저 곳 어딘 가에 내 방에 생길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라면 국물에 불은 밥알을 후룩 마시며 창문 밖의 불빛들을 물끄러미 내다보는 일. 당신의 가장 큰 낙이었지요.



머리를 참 잘 감으시네요, 그 손님이 처음 건넨 말이었습니다. 말쑥한 옷차림에 서글서글한 눈매, 말투에는 당신의 할머니가 생전에 쓰셨던 K도의 억양이 조금 묻어 있었습니다. 머리를 감기거나 말릴 때 손님에게 항상 말을 걸어야 하는 것은 당신의 의무였습니다. 시원하세요, 고객님? 어디를 더 감겨 드릴까요? 물이 차갑지는 않으세요? 지압을 조금 더 해 드릴까요? 머리를 내맡긴 손님들은 보통 그럴 때마다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손님은 달랐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고갯짓을 하지도 않았고, 묻지도 않은 사생활을 쉴 새 없이 떠들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당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사람 좋은 웃음을 웃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당신의 걱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리 안 아파요?


그리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남자를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몇 번 별 볼 일 없는 놈들과 연애라는 것을 해 보기도 했고, 몸을 섞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나와 비슷한 처지, 철 모르는 남자와의 사랑 놀음이라는 것이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로 오직 당신의 관심사는 ‘돈 모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 남자의 번듯한 옷차림과 자신감 넘치는 태도, 따뜻한 말투가 당신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남자가 다녀간 날은 헝클어진 머리를 거울에 새삼 비춰보는 당신이었습니다. 당신의 앞치마에 만 원, 이 만 원의 팁을 찔러 넣기를 몇 차례. 어느 날은 돈이 아닌, 얌전히 접힌 흰 종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종이를 펴 드는 당신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고, 가슴은 콩닥콩닥 뛰고 있었습니다.




ㅡ 매 주 월, 목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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