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당신의 목소리 (4)

by 지예

그 날.

남자의 검정색 승용차를 타고 도시를 빠져나가던 늦여름의 어느 저녁.


후에도 당신은 그 바람의 냄새를 오래 기억합니다.

그 남자의 승용차 조수석에 앉아 반쯤 열린 창문에 뺨을 대고 도시의 불빛들을 바라보던 기억과 함께 각인된 그 냄새를.


당신은 도시의 반짝이는 불빛들을 보고 있었고, 어쩌면 더 빨리 저 곳으로 닿을 수 있겠다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후에 당신이 울며 내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그렇게 죄였을까? 생각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생각이 죄는 아니었지만, 당신이 그 남자의 차에 타서 느꼈을 다른 여자와 어린 아이의 흔적을 모른 척했던 것 – 어쩌면 그 무지 - 은 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수리에서 시큼한 땀 냄새를 풍기던 어린 남자들, 싸구려 여관방에서 가짜 로고가 박힌 낡은 셔츠를 거칠게 벗던 남자와의 관계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썼던 피임 기구를 그 남자와의 관계에서는 괜찮을 거라 믿었던 당신의 순진한 허영도 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첫 번째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아이를 지우면 계속 만나주겠다는 그 남자의 말을 믿었고, 순진하게 수술대에 누웠습니다. 그렇지만 그 후 몇 번의 관계를 가진 후 그 남자는 더 이상 미용실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전화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당신은 다시, 완벽하게 혼자가 됐습니다. 왜 한 번의 수술을 하고도 나를 생기게 했는지, 세상의 누군가는 그것을 따질 지도 모릅니다. 나 또한 내가 세상으로 온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당신이 나를, 다른 영혼이 아닌 나를 이 곳으로 불렀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자포자기한 심정, 어쩌면 저물어가는 헛된 기대로 그 신기루 같은 욕망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나를 불렀고, 그리고 내가 생기자마자 끝도 없는 추락을 확인했으며 그 절망과 함께 오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나 만큼은 어쩌지 못하고 세상에 내려 놓아주었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결국 내가 말을 배우며 기억하는 것은 한 가지 뿐입니다.


나를 부른 당신의 목소리……말입니다.


보호자가 없어도 ‘쉽게 해주는’ 병원을 미리 인터넷으로 알아본 뒤였지만 당신은 잠깐 머뭇거리다 그 곳을 지나쳤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오가는 사람 – 그것도 웃으며 큰 소리로 이야기하거나 전화를 받는 행인들-이 너무 많았고 오늘따라 해가 너무 눈부셨어, 생각 했습니다.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내처 걸었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낯선 거리에 어스름한 그늘이 밀려들고 있었습니다. 이제 보이는 아무 병원이나 들어가야겠다 다짐하는 순간 길모퉁이에 세로로 붙은 OO산부인과 간판이 보였습니다.

낯설고 황량했던 골목의 느낌과 다르게, 병원 내부는 따뜻했고 포근했습니다. 소파에 엉거주춤 앉아 커다란 가습기에서 퐁퐁퐁- 구름처럼 흘러나오는 수증기들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쩐지 간호사들은 당신에게 이내 말을 걸지 않았고, 당신도 한동안 소파 구석에 놓인 쿠션처럼 조그맣게 앉아 있었습니다. 마침내 간호사가 “산모님, 이제 곧 접수 종료 시간이어서요.”라고 당신에게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순간 당신이 오늘 무엇을 하려 했는지 깨달았습니다.


의사는 푸근한 인상을 가진 50대 여자였습니다. 시종 부드러운 웃음을 잃지 않았고, 남편이 왜 따라 오지 않았는지, 왜 이렇게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하게 되었는지 결혼은 했는지 안 했는지 당신이 걱정했던 어떤 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의사가 물은 것은 의아하게도 그것 하나였습니다.


“첫 임신이신가요?


당신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수술을 했었어요. 5주 때…….”


“아.”

아, 그게 끝이었습니다. 다만 당신의 배 위로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며 남은 한 손으로 초음파 기계의 소리를 키웠습니다.


“들리나요? 심장 소리. 벌써 10주예요. 아기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네요.”

“…….”

“산모님.”


그 순간 당신의 심장이 크게 요동친 것을 기억합니다. 엄마 같은 의사의 ‘산모님’이라는 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나의 터질 듯한 심장 소리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화면에서는 제법 사람의 형태를 갖춘 내가 양수 속에서 부지런히 흔들거리고 있었습니다. 아이고, 그놈? 심장 소리가 아주 우렁차요, 누구 닮았나?

세심한 의사의 설명이 나의 심장 소리를 타고 계속 이어졌습니다. 제법 얼굴의 형태가 생기기 시작했네요. 귀가 생겨서 엄마의 말을 들을 수도 있고, 손가락 발가락도 분리 됐어요. 이제 하품도 하고 기분 좋으면 웃기도 할 거예요. 소리는 아직 못 내겠지만?


의사는 빙긋 웃으며, 당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습니다.

“……이제 완전한 사람이죠.”


진료를 마치고 나오는 길, 병원 대기실에 앉아있던 여자들이 새삼 눈에 들어왔습니다. 푹신한 소파와 향긋한 냄새, 그리고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 두 명의 여자. 잔잔하고 따뜻한 음악소리가 이 풍경들을 감싸 안고 있었지요. 모두, 마치 잡지 속 그림처럼, 행복하고 완벽해 보였습니다.


“김수인 산모님? 아기수첩 드릴게요.”

수첩의 표지에는 엄마가 아기를 안고 화사하게 웃고 있는 사진과 ‘행복한 엄마, 건강한 아기’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동글동글한 손 글씨로 쓰인 당신의 이름이 보였습니다. 김수인 엄마. 수첩을 내려다보고 있는 당신에게 간호사가 생글거리며 물었습니다. 다음 진료는 언제로 잡아드릴까요? 당신은 이 병원을 또 오고 싶다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엄마가 되어야겠다, 가 아니라 이 병원에 다니고 싶다. 처음 당신이 가진 열망은 그것이었습니다. 그 때 당신이 배에 손을 얹었습니다. 나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아 가만히 눈을 감았습니다. 내 기분이 당신에게 전해지기를 바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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