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지옥
나는 88학번이다. 대학생 때 했던 아르바이트 중에 가장 지옥은 냉면 공장 알바였다.
올림픽을 등에 업은 ‘88 꿈나무 세대’라는 멋진 타이틀을 달고,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지방 소도시에서 올라온 스무 살의 나에게 서울은 거대한 놀이동산 같았다. 물론 초등학교 때 큰오빠 집과 고모 댁에 와본 적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방학이면 오빠 집이나 고모 댁에서 얹혀살았다. 내 단짝 친구도 고모 댁에서 지내며 학교를 다녔고, 우리는 가끔 과 친구들 미팅도 주선하고, 축제 때는 서로를 초대했다. 서로 다른 학교, 다른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서울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느끼는 생경함은 같았다.
그때는 모든 게 새로웠다. 잠실 올림픽 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에 처음 갔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TV에서만 보던 ‘진짜’ 아파트였다. 집 안에 욕조가 있고, 친구방은 무려 2층에 있었다. 화장실도 실내에 있었다. 우리 집엔 마당이 있고 바깥에 화장실이 있었는데 말이다. 그날은 친구 집 화장실 물 내려가는 소리조차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졸업반이 되면서 이제는 오빠 집도, 고모 집도 눈치가 보였다. 친구와 둘이서 대방동 근처에 단칸방 하나를 얻었다. 단독주택 옥상 위에 덜렁 올려진 집, 옥탑방 하나 짜리 구조였다. 드라마에서 보면 전망이 끝내주고, 화분도 몇 개 있고 평상이 놓여 있어 멋져 보였는데 현실은 그 정반대였다. 방 하나에 수도 하나, 찬장과
곤로 하나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 그게 전부였다. 화장실도 계단을 내려가서 1층에 세 들어 사는 분들과 같은 공동 화장실을 써야 했다. 단열이고 뭐고가 없었다. 여름엔 엄청 덥고, 겨울엔 아주 추웠다. 친구와 비닐을 사다가 창문을 빈틈없이 덮어씌웠다.
그래도 너무 좋았다. 이제 진정 독립을 한 것이니까. 친구와 우리 둘만의 공간이 생긴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밤새 술을 마셔도 걸어서 집에 올 수 있었다. 다리를 건너 성모병원에 야간 근무하러 가는 친구를 데려다주며, 서울의 밤거리를 걷는 것조차 자유롭고 여유롭게 느껴졌다.
하지만 자유에는 늘 ‘돈’이라는 현실이 따라붙는다. 나는 각종 아르바이트를 설렵했다. 과 사무실에서 부탁해서 아르바이트 자리 들어온 것은 다 연락해 달라고 했다. 거리에서 차량 수를 세기도 하고, 기숙사 살 때는
방마다 우유를 배달하기도 했고, 주말에는 예식장에서 서빙도 했다. 예식장 알바는 맛있는 점심까지 제공되는 요즘말로 꿀알바였다. 이 중에서도 아직도 잊히지 않는 끔찍했던 알바가 있다.
바로, 냉면 공장.
오류동 쪽에 있는 냉면·라면 공장이었는데, 친구의 친구와 함께 여름방학 한 달 동안 2학기 생활비 마련을 위해 신청했다. 8월 숨조차 쉬기 힘든 열기 속. 공장 안은 찜통이었다. 쇠봉에 걸린 냉면이 뜨거운 공기 속에서 마르기만을 기다렸다. 나는 허리를 굽힌 채 몇 시간이고 면을 걷고 잘린 면을 포장했다. 육수 하나, 건더기 하나, 어쩌다가 실수로 수프를 2개라도 넣는 날에는 반장 언니의 눈총이 날아들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어리거나 같은 나이 또래의 노동자들은 일의 속도가 빠르고 힘도 세서 일을 척척해 냈다.
알바로 들어온 우리 같은 친구들은 3일을 못 버티고 나가더라고 반장 언니가 말하면서 가고 싶은 사람은 그냥 첫날에 나가라고 대놓고 말했다. 건조가 끝난 면발을 몇 시간씩 교체하고 걷어내야 하는 일이다. 냉면 건조용 쇠봉이 너무 낮아 허리를 굽힌 채로 해야 해서 죽을 맛이었다. 땀과 열기로 옷이 금방 젖었다. 공장 전체가 눅진한 밀가루 냄새와 습기로 가득했다. 그래도 점심시간에 제공하는 각종 라면, 자파게티, 국수, 면이란 면은 그때 다 먹어보았는데, 점심시간이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는 순간이었다.
세 시간이 지나자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고, 네 시간이 지나자 숨이 찼다. 쉬는 시간 20분, 계단에 쭈그려 앉아서 쉬는 그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나중엔 허리보다 다리가 먼저 아파졌고, 차츰 다리보다 정신이 나가버렸다. 그냥 ‘어지러움’이라는 단어로 설명이 안 되는 상태. 당장 그만두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진짜 이러다 쓰러지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이 알바를 간호학과 친구 따라 호기롭게 신청한 나를 탓했다.
한 달을 그렇게 일하고 받은 월급은 26만 원. 그건 피와 땀과 눈물이 고스란히 담긴. 내 청춘의 첫 월급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보다 더 힘들게 번 돈은 없는 것 같다. 사실 그때 공부가 몇 배는 더 쉽다는 걸 알게 됐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 나는 계단도 못 오를 정도로 허리가 아파졌다. 침 맞고, 약 짓고, 물리치료받으며 알바로 번 돈 그 이상이 날아갔다. 냉면 공장에서의 경험은 내 20대 초반의 체력의 한계를 인정하게 했고, 돈의 무게를 절실하게 실감하게 해 주었다. 내가 번 돈으로 밥을 먹고, 버스를 타고, 월세를 낸다는 사실. 그건 한 인간으로 자신을 책임지는 신성한 독립의 경험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 나는 다단계 알바도 해봤다. 너무 쑥스러워서 제대로 말도 못 꺼내고 잘렸다. ‘아, 나는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게 어려운 내성적인 사람이구나.’
그제야 알았다.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시 공부나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제는 내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었다. “알바 좀 해봐. 돈은 그냥 생기는 게 아니야. 인생에 쓸 때 없는 경험은 없으니, 뭐든 해 봐”라고 적극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글쎄다.
쉽진 않았지만,
뜨거웠고,
생생했다.
지금도 냉면을 먹을 때면 문득 떠오른다.
그 여름의 쇠봉 냄새, 땀, 그리고
‘진짜 어른이 돼 가는 중’이었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