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토행 비행기
"너 혼자 캐나다 간다고요? 미쳤어?" 언니가 놀라서 되물었다.
나는 뭔가에 빠지면 끝을 본다.
그러다 갑자기 흥미가 딱! 식는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알람이 울린다.
"이제 그만할까?"
이런 증상이 꼭 나쁜 건 아니다. 그 알람이 내 인생을 몇 번이나 구해줬으니까.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했던 알람은 1995년, 딱 그때였다.
시작은 좋았는데, 시작만 좋았다. 1992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특허법률사무소에 취업이 되었다.
다른 친구들보다 취업이 빨라서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신입 시절엔 일이 그 자체로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서류 번역도, 특허 출원도, 심사청구, 이의 신청도 서툴지만 내가 뭔가 ‘프로’가 된 기분이 들었다.
매달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이 무엇보다 든든했다. 더 이상 아빠나 언니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어서 나 스스로가 대견했다. 월세도 내고, 4대 보험도 들고, 재형저축도 들었다.
그야말로 경제적 독립의 찐 성취감에 스스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엄마에게 자랑스럽고 씩씩한 막내딸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3년쯤 지나자 문제가 생겼다. 반복되는 루틴, 끝없는 번역, 식어가는 열정에 김 빠진 콜라와 같은 일상이 지속되었다. 강남역으로 찾아오던 동기들 중 몇 명은 졸업과 동시에 미국,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래도 나는 형편상 참고 참으며 견뎌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의 의뢰인에게 전화가 왔다.
소장님은 출근이 늦으시고, 내가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말을… 너무도 빨리했다.
우리 측에 문제 제기를 하는 것 같았는데, 말이 너무도 빨라서, 무슨 말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평소처럼 팩스로 하면 될 것을 굳이 전화를 한걸 보면 꽤나 긴급한 일임에 틀림없다.
나는 "Yes, yes..."만 반복하며 땀을 뻘뻘 흘렸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손이 덜덜 떨렸다.
그날, 마음 한편에서 이렇게 속삭였다.
"너 정말 말을 못 알아듣은구나, 한심하다. 그동안 영어 해온 시간이 얼만데, 그렇게 쩔쩔 메다니,,, "
그러면 변리사 시험이라도 준비하자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쉽게 이일을 놓기 싫어서, 변리사 시험을 준비해 봤다. 민법, 특허법, 상법... 이건 마치 외계어였다. 책을 펼치면 눈앞이 까매지고, 내용은 전혀 흡수되지 않았다. 내 뇌는 계속 외쳤다.
"이거 평생 할 수 있을 것 같아, 잘 생각해 봐."
결국, 책 덮고 현실을 직시했다.
"이건 아니구나."
그리고, 주변에 있는 유학원에서 상담을 받아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미국을 생각했었다. 미국은 물가가 너무 비쌌다. 그런데 캐나다, 특히 토론토는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학비도 저렴하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혼자서라도 충분히 해볼 만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결심은 생각보다 빨랐다.
3년 동안 꼬박꼬박 모은 적금을 들고 1995년 3월 1일, 캐나다행 비행기에 올랐다.
대한민국이 독립한 그날에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독립 선언을 하였다.
“여자 혼자 캐나다를 간다고?”
그 시절, 이런 말을 듣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결혼은?”, “너 혼자서?”, “위험하지 않아?”, “미쳤니?”
하지만 이미 비행기 표는 내 손에 있었다. 아빠도 언니도 친구들도 나를 더 이상 말리지는 못했다.
큰 캐리어에는 내 인생이 들어 있었다. 유학생의 필수품인 작은 보온밥솥, 전기담요, 밍크담요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내가 추운 나라에 가니 언니가 꼭 챙겨가야 한다고 난리다.
토론토 피어슨 국제공항에 내렸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랬다.
"와... 진짜 왔다."
두렵고 설레고, 복합적인 감정이 온몸을 휘감았다.
주변은 모두 영어. 택시기사의 발음은 ‘인도풍 롤링 R’의 진수를 들려줬다.
그래도 준비는 철저했다.
어학원, 홈스테이 주소까지 모두 미리 예약 완료해서 두렵지는 않았다. 택시를 타고 찾아간 호스트집은
초등학교 선생님 집이었다. 502-60대쯤 되어 보이시고, 혼자 살고 계셨다.
정확한 발음, 깔끔한 문장 교과서처럼 잘 들렸다. 영어 교실 수업보다 훨씬 생생한 생활수업이었다.
내 방에는 침대 하나, 작은 TV 하나, 책상 하나. 서랍장 하나가 있었다.
화장실은 ‘바닥에 물 떨어뜨리면 안 되는 구조’라 특히 조심해야헀다.
식탁은 ‘각자 식사 후, 각자 설거지’가 원칙이었고, 모든 게 새롭고 신기했다.
식사는 늘 아쉬웠다. 아침엔 시리얼이나 치킨 수프를 먹기에 항상 허기졌다.
그래서 주말이면 호스트가 외출한 틈을 타서 라면에 누룽지를 말아 푸짐하게 한 그릇 뚝딱 해치웠다.
그게 진짜 호사였다. 혼자이지만, 매일매일 살아내는 내가 대견했다.
낯선 나라, 낯선 언어, 낯선 식탁.
그 속에서 어느새 나는 나를 길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캐나다까지 갔지만… 3개월 어학연수가 끝나갈 무렵, 나는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다음엔 뭐 하지?"
그토록 원해서 떠난 해외생활, 첫 발걸음은 잘 디뎠는데
이제는 다음 페이지를 어떻게 넘겨야 할지 막막했다.
"이제, 다른 걸 해볼까?"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