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병을 날려버린 소울푸드
토론토에 도착한 지 3개월이 지났을 무렵, 나는 고민에 빠졌다. 어학원에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제 어쩌지,,,'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야 할 순간이다. 그때 '투어리즘 직업학교'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어 등록을 결정했다. 이 학교에서 대만 친구 안젤리카와 부산 출신 크리스탈을 만났다. 크리스탈은 예쁘고 요리도 잘하는 친구였다. 나는 홈스테이를 나와 크리스탈과 함께 지하철 가까운 곳으로 집을 빌리기로 했다.
외국에서 집을 구하는 것은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다. 현지 부동산 계약 절차를 이해 못 하면 큰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는 주위의 걱정 어린 소리를 많이 들었다. 학교 선생님께 조언을 구하고, 계약서를 꼼꼼하게 살피며 드디어 우리 둘만의 공간을 마련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빌트인 오피스텔이었다. 주방에는 작은 인덕션과 냉장고가 있었고, 욕실과 옥장이 전부였지만 그 공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특히 가구를 하나하나 장만할 때가 제일 신났다. 매일 15층 창문을 내다보며 누군가가 이사 가면서 버리는 매트리스, 의자, 책상 등을 눈여겨봤다. "저거 괜찮은데!" 친구와 내 눈이 마주치면 재빨리 1층으로 내려가 괴력을 발휘해서 물건을 엘리베이터에 싣고 집으로 옮겼다. 최대한 빨리. 헌 물건이지만, 깨끗하게 닦고 커버를 씌우면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가구를 채워 넣으며 우리는 우리 둘의 공간을 완성해 갔다.
"왜 그때가 그렇게 행복했을까?" 그 이유는 바로 한국 음식을 해 먹을 수 있었던 덕분이다. 타지에서 먹는 한국 음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을 준다. 근처 아시아계 상점이 모여있는 어니스트 쇼핑몰에서 필요한 생필 뭄을 샀다. 차이나타운에서는 신선한 식재료를 구할 수 있었다.
배추는 구하기도 힘들고 비싸서, 양배추로 김치를 만들어 먹었다. 그리고 그곳은 꽃게가 싸서 꽃게탕을 자주 끓여 먹었다. 고추장만 풀어 넣은 꽃게탕이지만 그 맞은 호텔 요리 부럽지 않았다. 양배추 김치에, 하얀 쌀밥, 꽃게탕 한 그릇이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행복했다. 오랜 해외여행 후에 집에 도착해서 먹는 라면 한 그릇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해외살이에서의 진짜 고비는 영어도 아니고, 추위도 아니다. 바로 먹고 싶은 음식을 못 먹어서 생기는 향수병이다. 양배추김치와 쌀밥, 꽃게탕이면 향수병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때, 우리는 진짜 ‘살아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0에서 시작해서, 버려진 책상 주워오며 꽃게탕에 감동받는 삶은 겉으로 보면 초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두 다리로 서서, 온전히 나로 살아가고 있었다.
아무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 세상에서 매일매일이 모험이고, 매끼가 감동이었다.
우리들의 아지트에는 주말마다 파티가 열렸다. 일본, 대만, 홍콩, 중국, 멕시코, 자메이카, 콜롬비아, 중부 유럽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 각자 자기 나라 음식을 가져와 함께 나누고, 늦은 밤까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정말 활기차고 에너지가 넘쳤다. 이국적인 향신료가 가득한 음식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웠고,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김밥, 잡채, 불고기 같은 한국 음식은 항상 인기가 많았다. 우리 집뿐만 아니라 대만이나 홍콩, 태국 친구들 집에서도 파티를 자주 했었는데, 그때마다 새로 맛보는 음식들이 참으로 흥미로웠다.
대만 친구 안젤리카는 특히 대만 국수와 만두를 정말 잘 빚었다. 거의 몇백 개씩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주식으로 먹었다. 태국 친구 잔타나도 음식 솜씨가 좋았다. 똠얌꿍과 팟타이를 만들어 줬는데, 그때 처음으로 태국 음식을 접했다. 솔직히 말하면 똠얌꿍은 내 입맛에 맞지는 않았다. 너무 강력하고 독특한 맛이었다. 하지만 팟타이는 정말 맛있었다. 그 음식을 먹으면서 태국 음식이 세계적으로 왜 그렇게 찬사를 받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경험을 통해 나는 음식을 넘어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음식은 그 나라의 문화가 담긴 또 하나의 언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