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30년 만에 만난 남사친이 건넨 한마디

30년을 간직한 영어책

by 작가 앨리스

몇 주 전 대학 동기 남사친을 만났다. 서울에서 열린 북콘서트에 다녀오는 길에 그 친구를 만나러 갔다. 요즘 아이들 말로 '남사친'이다. 남자사람친구.


20대 시절, 우리는 대학교 과 동기였다. 낯선 서울에서 헤매던 나에게 먼저 친절하게 손을 내밀어준 친구가 바로 그였다. 지방에서 갓 올라온 촌뜨기였던 나에게, 그는 이태원과 과천서울랜드, 잠실 롯데월드를 소개하며 서울투어가이드 역할을 해주었다. 그 덕에 포켓볼 치러 당구장도 처음 가보고, 한강에서 오리배도 타보고, 압구정 로데오거리도 휘젓고 다니며 즐거운 청춘을 보냈다.



그는 영어 시험이 골칫거리였고, 나는 영어는 자신 있었다. 나는 기꺼이 그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었고, 그는 늘 나에게 투덜거리며 "넌 어떻게 이걸 다 알지?"라고 물었다. 나는 웃으며 "너 정말 한심하다"라고 놀려줬다.

남자 동기들이 군대를 가면서 자연스럽게 잠시 공백이 생겼다. 그는 복학생이 되었다.

나는 졸업 후 강남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복학생과동기들은 나를 뜯어먹겠다고 금요일 저녁마다 뉴욕제과 앞에서 진을 치고 기다렸다. 그 시절에는 뉴욕제과 앞에 6시-7시 사이에 서있으면 10명 중 1~2명은 아는 얼굴을 만날 수 있는 신기한 일이 일어나던 시절이다. 복학생 친구들과 투다리에서 오이소주와 꼬치를 먹으며 추억을 만들던 그 시절이 엊그제 같이 생생하다.

직장생활을 3년 동안 착실히 한 나는 1,000만 원을 모아서 어느 날 갑자기 캐나다행 비행기를 탔다. 그 이후 우리는 각자의 길을 걸으며 서로에게서 멀어졌다. 세월이 흘러 우리는 50대가 되었다.

얼마 전 동기모임에서 그와 재회했다. 오랜만에 보는 동기들은 많이도 성숙해 있었지만, 10분쯤 이야기를 나누자 금세 가면을 벗고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듯 격이 없이 떠들어댔다. 그 역시 어색함 없이 나를 반겼다.


모임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비가 내렸다. 그는 말없이 내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우리는 비 내리는 거리를 함께 걸으며 카페로 향했다. 젖은 어깨가 서로 닿을 때마다 괜히 심장이 콩닥거렸다.


브런치스토리이미지 (36).png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가 갑자기 진지해졌다.

"사실, 너한테 고백할 게 있어."

순간 심장이 덜컥했다. 그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그때 너랑 같이 공부했던 영어 책 말이야, 사실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어. 신기하지, 왜일까?"

나는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는 내게 사랑 고백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그 말에 뜸금없이 내 얼굴이 발그레해지고 더워지는걸 느겼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 나 역시 그 시절, 그의 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했었다는 것을.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가슴속에 작고 따뜻한 추억 하나를 다시 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서로의 삶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가장 편한 친구가 되었다. 젊은 시절의 설렘은 추억이 되었지만, 그 추억은 가끔씩 비 오는 날에 나를 괜스레 미소 짓게 한다.


친구는 이제 퇴사 후 1인 사업을 시작해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 있다. 그 시절 내가 건넸던 영어책 안에 뭐라고 썼더라 곰곰이 생각해 보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야, 딴생각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 이렇게 썼던 것 같은데.


"어이 친구, 사업 번창하고 늘 응원할게."

마음 한구석에 싱그러운 풋풋함과 은근한 설렘을 품은 채 말이다.

keyword
이전 04화냉면공장의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