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고사 이벤트
고등학교 시절이 유독 기억에 많이 남은 이유는 뭘까? 그만큼 절실했고 함께한 시간들이 넘쳐나서 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학력고사 '선지원 후시험' 마지막 세대인 우리는 아침 7시에 학교에 가서 아침 자습을 시작으로 하루 종일 학교에 갇혀있었다.
6시에 저녁을 먹고 졸음 방지용으로 모두 운동장에 모여 단체 체조를 하였다. 야간 자율학습, 일명 야자를 다시 시작하고 10시가 돼서야 귀가하는 삶을 살았다. 3년 내내.
지금 우리 아들딸들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우리 세대가 학교에 남아서 시끌벅적하게 야자를 했다면, 지금 우리의 아들딸들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학교에서 또는 학원에서, 스타디카페에서 장소만 다를 뿐 30년 동안 바뀐 것 하나 없이 동일하다.
이게 가장 큰 대한민국의 교육의 문제일 것이다. 학교를 다니면 다닐수록 아이들의 뾰족했던 개성과 창의성이 닳고 마모돼서, 둥그러지면서 평준화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그래도 빡빡함 속에 낭만이 있었다.
학력고사를 한 달여 앞두고, 우리 학교에는 희한한 전통이 하나 있었다. 학력고사의 긴장과 압박 속에서 잠시나마 설렘을 선사하는 이벤트, 바로 ‘합격기원 엿 교환식’이었다.
우리 지역에는 인문계 학교로 남고와 여고가 각각 1개, 상업 고등학교, 농업고등학교, 공업고등학교 총 5개의 고등학교가 있었다.
그중 여고는 남고 같은 반 친구들과 엿 교환식을 했다.
말 그대로 여고와 남고가 짝을 지어 같은 번호끼리 엿과 손 편지를 주고받는 행사였다.
“야, 이거 잘되면 핑크빛 로맨스가 되는 거야?”
“헛소리. 학력고사 끝나면 다 잊힌다.”
누가 봐도 같은 반 남고 학생에게 합격엿과 응원의 편지를 교환하는 방식이었지만 정작 우리들은 저마다 운명의 상대를 기대하며 상자 포장에 진심을 다했다.
나는 10반 43번. 지금도 여전히 같은 반 친구들 63명을 번호로 기억한다. 번호가 이름보다 먼저 툭 튀어나온다. 나는 처음에는 대충 편지 한 장 쓰고 말 요량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한창 하이틴 로맨스를 빠져 있던 터라 마음속에서는 각자의 하이틴 로맨스의 첫 페이지를 막 시작하고 있었다.
교실 분위기가 점점 가열되어, 뜬금없이 핑크빛으로 치달았다.
반 전체가 모두 흥분하여, 선물 상자는 뭐로 할지, 편지지는 어떤 색을 고를지, 찹쌀떡을 할지, 엿을 할지 서로 의견을 나누느라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 아주 신났다.
감독하시던 담임이 나가시자마자 사랑의 도가니탕처럼 들끓었다.
나와 친구들은 학교 앞 문방구에서 예쁜 상자를 사고, 거기다 조청 엿과 하얀 엿, 깨엿을 골고루 넣은 후 응원의 편지를 썼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다.
‘혹시 정말 이상한 애 걸리면 어쩌지?’ 이런 고민도 잠시, 상상 속의 43번에게 편지를 썼다.
얼굴도 모르는 3학년 43번 친구에게,
친구야 안녕?
공부하느라고 너무 힘들었지?
이제 한 달만 지나면 학력고사도 끝나니
우린 해방이야
우리 조금만 더 힘을 내자.
너도 나도
원하는 대학에 철썩 붙기를 기도할게.
행운을 빌어.
온 우주가 너를 응원할 거야.
지금 졸리니?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도
절대 졸음에 지면 안돼.
조금만 더 힘을 내자. 고지가 눈앞이야.
우리는 할 수 있어.
너를 응원해
시험 잘 봐 ^^
oo 여고 3학년 10반 43번
그렇게 거사를 치르는 날, 남고의 반장들이 음악다방 ‘해바라기’에서 여고반 반장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첨보가 들어왔다. 손에 큼직한 종이 가방을 들고 오던 남고 애들은 우리를 보자 한껏 긴장한 표정이었다. '합격기원 엿 교환 ' 이벤트가 왜 이렇게 떨리는 거야.
우리 반장이 엿 상자를 넘겨받고, 우리는 얼른 자기 번호를 찾아 열어보았다. 근데 내 상자를 본 순간, 나는 충격에 빠졌다.
‘… BYC 엄마 팬티 박스!’
진짜다. 흰색 바탕에 노랑머리 여자가 예쁘게 팬티를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 상자,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감성이라곤 1도 없는 상자에 엿 몇 개가 덩그러니 들어 있었다. 그래도 편지는 있겠지 기대하며 편지를 찾았다. 그런데 편지를 펼치는 순간 더 더 기가 막혔다.
야, 공부 힘들지?
나도 힘들다.
우리 시험 잘 보자.
- oo 남고 10반 43번
끝? 진짜 이게 끝이라고? 나는 황당해서 반 애들에게 상자를 보여줬고 곧 반 전체가 폭소로 난리가 났다. 심지어 반장이 “야, 저 녀석 누구야! 나오라고 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자꾸 이 엉성한 선물이 신경 쓰였다. ‘아니, 편지가 이럴 수가 있나? 적어도 한두 줄은 더 써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순간,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짜증이 나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BYC 팬티 상자’ 덕분에 이날의 해프닝을 이렇게 오래 특별하게 기억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학력고사는 끝났다.
우리 반에서는 63명 중 무려 3명의 커플이 이 이벤트로 탄생했다는 소식을 여고 동창회에서 후일담으로 전해 들었다.
그리고 25년 후, 여고 동창 모임에서 이 이야기가 다시 화제에 올랐다. 친구들은 깔깔거리며 배꼽을 쥐었다.
야, 43번 너도 잘 살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