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시 돌아갈래
내 인생에서 다시 한번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다.
모든 것이 새롭고 두려우면서도 마냥 설렜던 20대의 어느 여름날, 낯선 나라 캐나다에서의 시간이다.
7월 1일, '캐나다 데이'의 풍경은 지금도 또렷하다. 핼러윈과 크리스마스, 그 모든 명절마다 친구들과 파티를 준비하던 기억은 내 청춘의 가장 반짝이던 한 페이지다. 각 나라의 전통을 서로 소개하고, 음식과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던 그 날들. 단순한 유학 생활을 넘어, 타인의 문화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그 속에서 언어는 자연스레 내 것이 되었고, 내 안에 있던 낯섦과 두려움도 조금씩 사라져 갔다.
어학연수를 마친 후, 나는 늘 꿈꿔왔던 ‘Travel and Tourism’ 직업학교에 등록했다. 막연한 기대와 열정으로 시작한 학교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더 험난했다. 현지 친구들의 빠른 말투를 따라잡기 위해 매일 밤 스스로를 채찍질했고, ‘나는 이곳에서 잘할 수 있을까’란 질문을 수없이 되뇌었다.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를 다그치는 와중에도, 어느 순간 문득 내가 영어로 생각하고 말하고 있다는 걸 느꼈을 때, 작지만 분명한 성취감이 나를 지탱해 줬다.
그 시절의 또 다른 보물 같은 기억은, 유럽, 멕시코, 캐나다 여행이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위해 아주 좋은 가격으로 교통편을 제공했다. 1995년 늦가을, 대만 친구 안젤리카와 함께 떠난 첫 유럽 여행. 네덜란드의 좁고 가파른 계단이 있던 숙소, 조식으로 샌드위치를 최대한 많이 먹고, 더 챙겨서 점심을 대신하던 유학생의 생존기, 그 모든 게 지금은 너무나 소중한 추억이다. 리익스 미술관에서 마주한 렘브란트의 '야경', 반 고흐 미술관에서 눈앞에 펼쳐진 '해바라기'와 '자화상'은 내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전율을 안겨줬다. 책 속 그림이 아닌, 그 화가의 숨결이 서린 실제 작품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예술이라는 것이 가슴을 울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암스테르담에서 파리까지는 야간 버스를 탔는데, 예상치 못한 대중교통 파업과 겨울의 황량함이 우리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 어떤 불편함도 우리의 설렘을 막을 순 없었다.
두 명이 겨우 들어가는 엘리베이터, 친구의 자취방에서 나눴던 초콜릿과 와인, 바게트와 잼으로 차린 아침 식사. 배고팠지만, 마음만은 세상 누구보다 부유했다. 파리 하늘 아래에서 우리는 배움과 낭만, 그리고 현실 사이의 균형을 배워갔다. 여행이란 늘 예상과는 다르지만, 그 다름 속에서 진짜 감동을 찾아가는 여정임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또 하나, 내 마음을 뭉클하게 했던 순간은 나이아가라 폭포와 캐나다 데이의 대축제였다. 캐나다 데이를 맞이하여 친구들과 토론토에서 쉽게 갈 수 있는 동부 여행을 계획했다. 말문이 막힐 정도로 압도적인 나이아가라의 위용 앞에서, 나는 내가 얼마나 넓은 세상에 살고 있는지 실감했다. 캐나다 쪽 폭포는 웅장했고, 미국 쪽은 자연스러웠다. 당시엔 비자 없이 건너갈 수 없던 국경 너머를 바라보며, 나는 ‘언젠간 꼭 저 편에서도 바라보리라’ 다짐했었다.
토론토에서 기차를 타고 오타와, 퀘벡, 몬트리올, 킹스턴, 사우전드 아일랜드, 빨간 머리 앤의 이야기가 펼쳐젔던 동쪽 끝 마을 프린스 에드워드 섬까지 이어진 여행이었다.
특히 퀘벡은 마치 작은 프랑스 같았다. 그곳 거리에서 내가 그려졌던 캐리커처는 아직도 내 보물 1호다.
소녀 시절 즐겨 읽던 『빨간 머리 앤』이 떠올라서 꼭 가보고 싶었던 캐나다 동쪽 끝, 프린스 에드워드 섬(Prince Edward Island)을 향해 날아가 있었다. 『빨간 머리 앤』의 배경이 된 그 섬, 비록 소설 속 애번리(Avonlea)는 가상의 마을이지만, 실제로는 캐번디시(Cavendish)라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마을이 그 모델이 되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그곳을 찾아 초록 지붕 집(Green Gables)과 붉은 흙길(Red Road), 샬롯타운(Charlottetown)을 걸으며 앤의 흔적을 따라간다.
당시의 사진을 다시 꺼내어 보니, 시간은 흐르되 감정은 빛바래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모험심으로 가득했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용기를 지녔었다. 젊음은 단지 나이의 문제가 아니란 걸, 지금에서야 알 것 같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조금 더 천천히, 그리고 깊이 그 순간들을 음미하고 싶다. 하지만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도 존재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그 시절의 나에게 조용히 인사를 건넨다.
“잘 지냈니? 나는 네가 참 그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