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눈가루가 뿌려진 얼음 강 저편으로 한 그루 나무가 보인다. 햇살이 나뭇가지를 어르고 있다. 섶나무 줄기처럼 메마른 단풍나무 끝가지에 이파리 몇 개가 바스러질 듯 매달렸다. 나뭇가지들은 갈꽃을 떨어낸 갈대처럼 뾰족했지만, 선의 겹침이 나란하여 다정해 보인다. 짚처럼 날렵한 나무 초리를 따라가 보았더니, 아하! 그것은 햇살이 비춰낸 걸개그림이 아닌가.
겨울 햇살이 나뭇가지를 스치면서 롤 스크린에 근사하게 그려낸 소묘 한 점. 잔가지에 포로롱 새가 날아와 포닥이며 꽁지 춤을 추고 있다. 엄동설한을 용케 버티던 이파리가 뱅그르르 어지럽게 떨어져 내린다. 그것은 찰나의 우주이고, 애써 걸지 않은 그림이다. 햇살이 들어오는 양에 따라 그림의 음영이 순간순간 달라지고 있었다.
지난주일, 미사를 마치고 따끈한 차가 마련된 휴게실에 앉게 되었을 때, 하얗게 내 시야를 밝혀주던 커다란 걸개그림 하나. 그것은 찌든 세상을 향해 잠깐 열어 보인 맑은 영혼의 창문 같았다. 흰색과 잿빛으로 그려진 수묵화는 나뭇가지에 비껴 든 바람과 햇살의 절묘한 조화가 이뤄낸 수작이었다. 옆에 있던 교우는 그 그림을 순간 포착해야 한다며, 나를 그림 앞에 세워 찍었다. 그 카메라로 같은 자리에 그 교우를 세우고 내가 셔터를 눌렀다. 늘 보던 장면이었을 텐데 그날 유난히 눈에 띈 것이다. 환한 성당 마당에서 초라하게 보이던 겨울나무 한 그루가 한 겹 유리 안으로 스며들어 스크린에 걸러지면서 세한도처럼 격조 있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창호지 문틀 속의 은은한 문향처럼 여백에서 절제미가 느껴졌다.
며칠 뒤, 참 희한한 일이라며 그 교우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기 사진에는 그 배경이 백지로 나왔는데, 내가 찍힌 사진에만 햇살 그림이 찍혀 있더라고. 시시각각 변하는 해의 움직임에 따라 형상을 달리 한 것일 뿐 사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햇살이 창을 넘을 때 마침 우리가 거기 있었고, 우리의 눈빛과 닿았을 찰나에 햇살 그림이 그 순간을 비춰낸 것이다.
삶이 찰나라는 것을 햇살 그림이 넌지시 알려준 것이다. 그런 순간의 삶이 하루가 되고 달을 채워 한 해가 된다. 한 해 두해 세월이 쌓여 누군가의 서사가 되어 역사로 남는 이치다. 삶과 죽음의 차이는 한 호흡이라는 말처럼 삶은 한 호흡 쉴 때마다 순간이 사라져 가는 시간의 사멸이다. 삶은 사라짐의 과정이며 풀잎에 내린 이슬처럼 덧없음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덧없는 인생에 뭐 그리 일희일비할 일이 있는가 하는 깨달음을 햇살 한 줌에서 얻는다.
햇살이 나뭇가지를 은연히 비춰낼 수 있었던 것은 투명한 창과 이를 거름 없이 받아낸 민무늬 하얀 스크린 때문이었다. 그 스크린을 사람에 견주어 본다면 잡다한 생각들을 거두어낸 청안(靑眼)한 모성의 영혼과 비견될 수 있다. 늘 맑은 영혼을 지닐 수 있는 삶이길 소망하여 본다.
햇살이 놀다간 식탁 위에 가만히 손을 얹어 보았다. 황소바람이 불어와 문을 닫아걸어도 해님은 창을 통해 들고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더함도 덜함도 없이 해는 언제나 제 자리를 머물다 간다. 우리가 그것을 눈여기지 못해 느끼지 못할 뿐이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그것에 대한 느낌은 사뭇 달라지는 법이다. 집안의 해가 되어 집안 구석구석을 뽀송하게 비추는 햇살은 어머니. 아내들의 평범한 도가 비워낸 찻잔에 크림색 햇살로 들어앉는다.
싱글 맘을 선언한 모 여인의 말이 생각난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이유로도 자기를 비난하지 않고 한 편이 되어 준 것은 어머니와 가족뿐이었다는 말. 그래서 어머니가 되는 길을 어렵게 택했다며 핏덩이 아이를 안고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아련하다. 어머니의 정성이 세상을 이어가는 한 축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한하며 언제나 진행형이다. 어느 한 곳 가림 없이 비춰내는 햇살처럼 우뚝한 존재이다. 때로는 보이지 않게 내일도 모레도 햇살은 다시 그 자리를 찾을 것이다. 햇살 그림은 어머니의 손길처럼 우리가 있는 자리 어디에도 찾아 들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