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난리가 뭔지도 모를 때였다. 골목을 지나 마당으로 들이닥친 물줄기가 순식간에 부엌을 삼켰다. 황토물이 툇마루를 넘보자 아버지와 엄마는 허둥지둥 옷가지와 이불을 다락에 밀어 넣었다. 들이친 물길이 급하게 걷어 올린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잡아 내리며 넘실넘실 방을 점령하더니 차츰 수위를 높여 갔다.
무서운 날이었다. 겁에 질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수재민이 되었다. 학교 강당 마룻바닥에 담요를 깔고 물 젖은 새처럼 작아진 몸을 웅크려 엄마 옆에 누웠다. 나는 잠들지 않고도 가위눌렸는지 숨이 찼다. 물에서 빠져나왔는데도 여전히 물에 잠긴 느낌이었다. 그럴 때마다 눈을 감은 채 엄마 가슴께로 머리를 박았다.
장마는 물의 상처를 남기고 언제 그랬냐는 듯 걷히었다. 한강 둑 밑에 사는 탓으로 해마다 겪는 일이었다. 모처럼 해가 떠서 일어났지만 몸은 무겁고 마룻바닥의 냉기가 등짝을 떠나지 않았다. 엄마는 흙탕물이 고인 살림살이를 꺼내어 수돗가에서 헹구고 닦는 일을 반복했다. 방의 물기가 가시고 바닥이 매끄러워지자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며 다락에서 이불을 꺼냈다. 방바닥에 깔린 이불은 다행히 젖지 않았다. 축축함이 남아있는 방에 찬기 어린 몸을 눕혔다. 방이 말라갈수록 벽 얼룩은 벽지의 무늬를 지우며 선명하게 덧무늬를 씌웠다. 물의 지문이었다.
오래된 일이지만 등짝에 남은 마룻바닥의 냉기는 지금도 내 몸 구석구석을 배회한다. 그 시절 새처럼 작아졌던 나는 어른이 되었어도 그날의 냉기가 떠나지 않는 것 같다.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가 머릿속을 맴돈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는가. 대체 행복이란 무엇일까. 물의 상처를 잊는다고 행복한가. 물속을 빠져나오던 그때처럼 삶에서 허우적거린 날이 많았다. 쓸려간 하루가 어둠에 묻힐 무렵이면 방 벼락의 얼룩 같은 슬픔이 해거름에 언뜻거린다. 그 시절 물에 잠긴 집을 빠져나오던 날처럼.
세월이 물 같이 흘렀다. 나는 마치 연어처럼 3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 그때 친구가 보내온 봄 편지를 다시 읽는다. 꽃 피우지 못한 봄날의 고뇌가 강에 빠져든 듯 유랑한다. 나의 분신 같았던 친구는 졸업 후 불투명한 앞날의 심산한 마음을 적고 있었다. 난 그때 이미 결혼하여 울산에 살았고 첫아이를 가진 채 시아버님 간병으로 서울과 울산을 오갈 무렵이었다. 그 일을 핑계로 친구의 아픔을 제대로 읽지 못한 자책이 물색없이 올라온다. 편지의 서두에서 친구는 어릴 적 낯선 동산에 버려진 후, 문둥이에게 쫓기다가 철조망에 갇혀 공포에 떨던 자신의 꿈 얘기를 전했다. 자기 집을 문둥이들이 들끓는 철조망 둘러진 동산이라 묘사했다. 내가 물에 쫓기듯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집을 떠나야 한다는 절박함이 물씬했다.
친구는 철조망을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때부터 친구는 술과 물에 중독되었던 것 같다. 냉혹한 현실에 던져진 자신을 가치 없는 미물로 단정해버린 20대 후반의 고뇌가 가시처럼 돋아나 있다. 그즈음 친구는 서울을 떠나 시골로, 또 다른 도시로 떠돌았다.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곳에서의 방황이 마치 겨울날의 억새처럼 푸석거린다.
친구에게 베풀던 나의 위로는 오히려 친구의 염증을 더 깊어지게 한 것인지 모른다. 친구가 방황의 늪에 빠져있을 때 나는 왜 짐짓 입과 귀를 닫았을까. 어린 시절 물에 베인 기억 때문이었을까. 집 안으로 들이닥치던 물길처럼 회한에 잠긴다. 친구는 15년 전 낯선 도시에서 기어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내 슬픔에 열중했던 나는 속울음만 삼켰다. 그 후로도 나는 희망 없는 봄, 꽃 피울 수 없는 청춘을 호소하던 친구를 섣불리 잊었다. 나의 두려움은 끝내 비굴하였고, 내 아픔을 가리는 옹졸한 회피였다.
“불쾌할 정도로 화사한 봄날, 이곳에서는 다행히 개나리 진달래가 만개한 봄날을 직접 느끼지 못해 견딜만하다. 새로 이사 온 집이 남자 중학교 바로 밑이라, 쉬는 시간을 알리는 음악 종소리 ‘엘리제를 위하여’가 한 시간 간격으로 들려온다. 떠들어대는 아이들의 소리가 짜증 나도록 무료하다. 건강한 사고를 하는 이들은 봄이 희망적이라 좋다고 하지만 난 봄이 싫다. 무료해서 싫다. 화창해서 싫다. 배신당해서 싫다. 스물일곱 해 동안 나도 여느 사람들처럼 건강한 희망에 부풀어 작은 청사진을 그리곤 했지만, 번번이 먹칠을 당하곤 하였다. 올봄부턴 아무런 계획 없이 텅 빈 가슴으로 묵묵히 바다처럼 흐르다 날 사랑하는 갯바위를 만나게 되면 외로움을 나누리라.”
살기 위해 몸부림친 청춘의 방황과 체념이 각인된, 꽃피지 못하고 떠난 친구의 유서 같은 봄날은 아프고 시렸다. 푸른 바다의 갯바위는 말없이 파도를 끌어안는다. 파도는 때론 사납게 갯바위를 때리지만 부드럽게 갯바위를 품기도 한다. 갯바위는 아주 작은 섬이고 파도는 바다의 외침이다. 거칠게 몸을 부수어 허옇게 쏟아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 엄숙하게 화답해 주는 삼인칭 ‘그’의 위안이 들린다. 끝까지 걸어가야 보이는 곳, 걸어서는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곳, 그곳에 발끝 멈추고 바다를 바라보면 그물 벗어난 물고기처럼 자유로워진다. 살아온 삶과 살아가야 할 삶이 파도에 출렁인다. 신의 손길처럼 가난한 몸을 일으켜 주고 따뜻하게 손잡아 주는 ‘그’를 만날 수 있는 곳, 물의 나라에 눈물을 보태며 친구는 속으로 젖고 있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무는 해를 바라본다. 석양빛을 받은 강이 고요하다. 모든 고뇌는 저 강물처럼 차갑고 거칠게 흐르다가 가지런해지는 속성을 지닌다. 세상을 비추는 강물은 누군가의 마음으로 흘러들다가 눈물처럼 슬픈 영혼을 베기도 한다. 영혼이 마르고 갈라져 황폐해지면 마음속은 작은 바람에도 흙먼지 나뒹구는 사막이 된다. 울음을 터뜨리지 못한 슬픔이 숨어 사는 곳. 거기서 몇 방울의 빗물을 기다려야겠다. 너의 오래된 상처를 다시 읽는 저녁, 물에 베인 나의 기억과 몸에 깃들었던 냉기가 석양에 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