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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me Dec 01. 2022

소 방울 소리에

 언 땅이 녹기 시작하면 밭고랑을 오가는 농군의 발길이 잦아진다농부들은 뒤 쓰레질로 분주하고질척한 땅에서 묻혀온 흙무더기들이 덩이로 신발에 달라붙고 농군의 소맷부리와 바짓부리는 흙 범벅이 된다

 괭이도 들어가지 않던 땅이 부드러워지고갇혀 있던 생명들이 나무 달구질과 쟁기질에 의해 고물거리기 시작한다쇠스랑을 스치며 숨을 들이켜는 소리유충들이 기지개를 켜는 소리다소 방울 소리를 들으며 황토 빛 아지랑이가 춤추고 스멀거리는 땅 속에서 봄이 씨앗 품을 준비를 한다.


   고랑마다 워워소 방울 소리를 실어 나르는 농군이 맨발로 논에 우뚝 선다우직한 소의 느린 발걸음이 논흙에 스며드는가 싶더니 이랴-’ 해찰하는 소를 나무라듯  농부의 고삐를 당기는 소리가 논두렁에 들어박힌다모과 꽃나무가 한창 꽃을 피우는 중이다먼 산을 바라보듯 황소가 눈을 끔뻑이자나이 든 농부의 다리에 힘이 붙기 시작한다농부와 황소는 한 몸인 듯 논밭을 어깆거리며 쟁기질에 여념 없다겨우내 굳었던 몸이 풀리는지 소의 하품소리가 길어진다.


  땅은 심은 대로 거두고 한 마음으로 자리를 지킨다그 마음이 어머니와 같아서 예부터 대지는 어머니에 비유되곤 한다어머니들은 밭 매던 손으로 적삼을 풀어헤치고 논두렁 밭두렁 어느 곳에서나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촌 어미들의 그런 모습은 누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았다우직하게 농토를 지키는 농군이 걱정 않고 편안하게 사는 때가 언제나 올까마는너나없이 농사가 힘들다고이렇게는 못살겠다고 도시로 나가더니 이제 도로 귀농이다귀촌이다 핑계를 대고 하나 둘 농촌으로 돌아오고 있다어쨌든 정신없이 살아도 힘겨운 도시의 삶보다 손발 움직인 만큼의 대가를 돌려주는 고향 땅은 어머니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다시 농부가 되려고 돌아온 자식들은 흙에 발을 디밀고 나서야 어미젖을 문 아기처럼 평온을 되찾을 것이다제가 나고 자란 땅에서 그 흙냄새를 제대로 맡을 줄 안다는 것은 그것을 선택한 사람만의 행복일 것이고농사일을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가슴에서는 감히 찾아볼 수 없는 행복이 그들에게 주어지리라김매는 유순한 손에 피살이가 힘차게 뽑혀 나가고 나면 땅을 믿고 사는 농부들에게 알진 곡식들이 누런 들판으로 보답할 것이다.

  모과 꽃 냄새가 진동하던 외가 마을이 도시 숲 서편에서 아슴푸레 노을을 따라간다해가 지도록 일하던 소가 개울을 넘을 때농부는 자식처럼 소를 어른다저녁 짓는 연기가 굴뚝을 타고 사라진다소 방울 소리가 느리게 사립문을 열던 어느 봄날 저녁이었다고봉 밥상이 차려진 대청에서 큰소리로 일꾼을 불렀다.

 일꾼 양반 어서 와 밥 묵소오~!” 

 그 소리를 따라 하던 언니 옆에 붙어서 나도 일꾼을 기다렸다잠시 후 일꾼은 토방 아래 우물가에 보였다흙 묻은 발을 씻고 나오는 일꾼의 두 다리가 아버지의 다리처럼 듬직해 보였다고봉밥을 흘리지 않고 밥을 맛있게 먹는 일꾼을 쳐다보며 신기해하던 저녁은 내 마음도 봄바람만 큼 다스웠다

  바느질감이 늘어나 일손이 바빠지면 엄마는 나를 곧잘 외가댁에 맡겼다대여섯 살 무렵의 일인데도 또렷이 기억이 나는 것은 신통한 일이다엄마는 바느질을 잘했었기에 그 솜씨로 삯바느질을 했었다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나는 혼자 잘 놀다가도 어스름하게 해가 지면 대청마루의 기둥에 얼굴을 묻고빙그르 젖은 눈을 까막거렸단다.

 울 엄마 지금쯤 꽁치 사러 장에 갔건네 할머니

기둥을 붙들고 그 소리를 오물거린 것은 꽁치가 먹고 싶은 게 아니란 것을 할머니는 훤히 알고 짐작했었던 것이리라어미가 보고 싶은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기둥에 붙어 있다가 애먼 할머니의 치마꼬리만 붙잡고 늘어지더라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귀에 남았다먼저 세상을 떠난 엄마가 생각나는지 어느덧 백수를 바라보는 외할머니는 간간이 내게 그 소리를 하셨다그러던 것이 저리 많이 컸다고 나를 가리키며 지나간 세월을 굽어보시곤 하시더니만요즘은 경로당 가는 길도 잃어버리기 일쑤여서 집에만 계신다고 한다.


  그 시절의 엄마보다 더 나이가 든 나는 그 일꾼의 굵은 팔뚝과 건장한 가슴에서 아버지를 느껴졌던 것을 떠 올려 본다일꾼이 두레박질로 연거푸 물을 퍼서 내 발을 씻기고 두 팔로 불끈 나를 안아 마루에 앉혀 줄 때나는 떨어질세라 일꾼의 목덜미를 꽉 끌어안았었다서울로 돈벌이 가신 아버지를 연상해서 그랬던 것이었을까나는 정희 언니의 말을 따라서 일꾼 어서 밥 묵소오~오~” 하고 장난을 걸 듯 밥상 앞에서 알랑거리면일꾼은 어린것이 엄마 없이도 잘 견딘다며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엉덩이를 토닥여 주었다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혀를 끌끌거리면서 나를 이쁜 강아지라고 불러줬다어미와 떨어진 강아지는 그날 저녁 할머니 치마폭에서 일꾼 등허리로 저녁 내 왔다 갔다 하다가 할머니 등에서 잠이 들곤 했다여물 죽 만나게 먹던 소도 고단해 늘어지고희붐한 부엌 연기처럼 밤안개가 자욱했던 그날 봄밤은 달빛을 품고 거 무숙숙 익어 갔을 것이다.


  다시면에 있는 외가 ‘사귀실’ 풍경이 성수동 서울 숲 바람의 언덕에서 달콤한 봄바람과 섞인다서울이 삶의 터전이 되었지만 남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언제나 맘 속에 갈피 지어 있다소 방울 소리가 스며들던 고향의 대지처럼 내 땅이 되어주었던 엄마와 아버지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지금은 내가 엄마처럼 나이가 들었고내가 그랬던 것처럼 엄마인 나의 존재가 우리 아이들의 마음속 땅이 되어 줄 거라고 생각하지만우리 아이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할지는 의문이다.


  밭일을 나간 할머니를 기다리며내 엄마가 어릴 적 부여잡고 있었던 그 대청 기둥에 내가 매달려 있었다지금은 손자의 손자들이 대대로 그 기둥을 붙잡고 맴돌곤 한다피붙이들의 손때가 묻어 반질해진 그 기둥은 윤회의 상징이 되었다그 기둥에서 할머니를 보고엄마를 기억하고 내 딸아이를 생각해 본다해마다 새봄을 기다리며 땅을 일구는 정직한 농부처럼 이런 윤회가 이 세상을 이끌어 가는 힘이 되어줄 거라는 믿음이 들자 마음이 엄숙해진다엄마를 그리워하던 기억 때문인지 지금도 석양빛을 보면 늘 서글프다내일도 외가의 소는 어김없이 묵중한 방울 소리를 논두렁에 쩌렁쩌렁 울릴 것이다해 질 녘 눈가에 물기 차는 버릇은 언제나 내게서 없어지려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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