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 A형 독감에 걸려 먹는 밥이 쓰다
변해가는 애인을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고
늘어나는 빚 걱정을 하며 먹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달아도 시원찮을 이 나이에 벌써
밥이 쓰다
돈을 쓰고 머리를 쓰고 손을 쓰고 말을 쓰고 수를 쓰고 몸을 쓰고 힘을 쓰고 억지를 쓰고 색을 쓰고 글을 쓰고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쓰고 약을 쓰고 관을 쓰고 쓰고 싶어 별루무 짓을 다 쓰고 쓰다
쓰는 것에 지쳐 밥이 먼저 쓰다
오랜 강사 생활을 접고 뉴질랜드로 날아가 버린 선배의 안부를 묻다 먹는 밥이 쓰고
결혼도 잊고 죽어라 글만 쓰다 폐암으로 죽은 젊은 문학평론가를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다
DA 300
찌개그릇에 고개를 떨구며 혼자 먹는 밥이 쓰다
쓴 밥을 몸에 좋은 약이라 생각하며
꼭꼭 씹어 삼키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고
떼꿍한 눈이 머리를 쓰다듬는 저녁 목메인 밥을 쓴다
-정끝별 밥이 쓰다
브리야 사바랭에 따르면 인간에게 새로운 요리의 발견은 우주에서 새로운 별을 발견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다 또한 식사의 즐거움이란 세대 여건 나라 등을 불문하고 매일의 찾아오는 즐거움으로 여겼다 이 즐거움은 다른 즐거움에 대부분 연결되며 다른 즐거움을 잃더라도 마지막까지 우리를 위안을 주는 것이 바로 식사라고 말한다
그리고 먹은 음식을 말해 주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Jean Anthelme Brillat-SavarinPhysiologie du gout 1948) 그만큼 먹는 음식과 그 사람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다
시에서 화자가 먹는 밥은 맛이 쓰다 왜냐하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쓸 일이 많기 때문이다 시에서는 ‘쓰다’라는 언어의 다의성을 활용한 언어 유희가 나타난다 사랑의 의미에는 친밀감 열정 헌신의 세 요소가 함께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사랑의 요소가 조화를 이룰 때 사랑은 가능하며 지속된다(Robert J Sternberg 1986)
하지만 시에서 애인이 변하는 것도 이 세 요소의 조화가 깨지면서 일어나는 상황이다 쓴맛을 느끼는 점은 신체의 감각체계 즉 화학 감각의 일부가 활동하는데서 기인된다 맛을 느끼는 복잡한 과정은 코 입에 분포된 특수한 세포 즉 입안 혀 목의 미각돌기를 자극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이 특수한 감각세포는 뇌로 신호를 보내고 뇌에서는 맛을 식별한다 입안의 표면에 있는 이 세포가 신경섬유에 정보를 보내면 단맛 신맛 쓴 맛 짠맛을 느끼는데 후각과 합쳐지면서 맛을 느낀다
시에서는 ‘쓰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이 시에서 사용된 ‘쓰다’라는 말은 동음이의어로서 각각 다른 ‘쓰다’가 지닌 의미의 연속에서 공동체 문화가 와해되고 그 속에서 화자는 쓴 밥을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정을 짚어보는 과정을 나타내고자 하며 화자 역시도 쓴 밥을 먹는다
시에서 언급된 밥은 함께 맛있는 밥맛을 상실한 데에서 오는 쓴맛이다 ‘밥맛이 쓰다’는 의미 속에 ‘삶이 쓰다’는 함축적인 의미가 내포된다 밥이란 맛있게 함께 먹어야 하는 것이 순리이며 서로 공평하고 편안하게 나눠 먹어야 한다
누구나 공평하게 밥을 먹을 수 있어야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만연한 현대 사회는 전통 사회와 다른 형태의 경제적 불평등이 존재하고 ‘밥’에 대한 불평등 역시 이러한 경제 구조와 맞물려 있고 또한 각기 다른 가치관과 더불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밥에 대해 가치를 규정짓는 등 변화되어 온 점을 부인하지 못한다 가진 자의 밥과 가지지 못한 자의 밥이 다르고 그들이 나눠먹는 밥은 존재하는지의 여부에도 확신은 없다 그러기에 화자의 밥은 쓴 맛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