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히 15년은 넘은 얘기다 해도 될까?
내가 가르치는 학생 중에 한 학생은 그의 어머니도 대학에서 내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계속 이 아이를 가르친 셈이다. 그러니까 딸도 어머니도 내 제자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 아이 수업을 마음이 짠하여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그 집의 아들, 딸은 정말 갓 깎아 놓은 밤톨씨처럼 이목구비가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이 단정하고 예쁘다. 특히 아들은 총기 총총하여 뭐든 모르는 게 없다. 그 아이들의 어머니 역시 대학 행정업에 종사하는 재원이다. 재치도 있고, 업무능력이 뛰어나 자기 일에서 똑 소리가 날 만큼 뭐든 못하는 게 없이 유능하다. 또한 자기 관리도 철저하여 주변에서도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의 엄마와 아이들 사이에는 서로 사랑에 대한 표현이 서툴다. 내가 느끼기에는 이들은 서로의 사랑에 갈급해 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따뜻한 엄마의 사랑이 필요하고, 엄마는 엄마대로 유능한 엄마 노릇도 하고 싶고 아이들의 사랑도 듬뿍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내면에 깔려 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의 엄마 노릇은 자기 업무처리 능력만큼 유능하지 않은 듯하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그렇듯이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자라는 저마다의 방식대로 유연한 교육방식으로 엄마 노릇을 해야 하는데 대체로 모든 엄마들이 그렇듯이 단계마다 초보의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머니들이 아이를 잘 키운다고는 하지만 나름대로 지적인 충족과정여서는 부족한 부분도 또 많이 지적된다. 이들 가족에게 느낀 점은 사랑의 표현 방식이 대체로 서툴고 소극적이다. 엄마는 내면에 잠재된 자식에 대한 자잘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듯하다. 자주 껴안아 주거나 입 맞추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어쩌면 그런 사랑을 받으며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도 자식에게 그런 사랑의 표현에 서툴 수 있다. 그런 표현에 서툴기는 하지만 이 아이들의 자식 사랑은 유별나다. 자기 스스로는 느끼지 못할지라도 얘기를 해보면 느껴진다. 하지만 종종 아이들은 그런 표현을 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사랑을 덜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할머니가 키운 아이들은 대체로 할머니를 엄마라 여기고 엄마는 거의 자신과 동격시한다
그들의 아우성이 내 귀에는 이렇게 들린다.
아이들 : 엄마의 사랑을 듬뿍듬뿍 넘치도록 많이 받고 싶어요. 날 좀 더 자주 안아주세요.
엄 마 : 얘들아, 너희들을 사랑해, 그리고 날 많이 사랑해 줘
사람들은 누구나 자식에 기대를 많이 건다.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기 바라고 나은 배우자를 만나기 바라고 나은 환경에서 살아가길 바란다. 그렇지만 그 자녀는 부모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 기대를 영원히 채워줄 수 없다. 또 사람들은 자기 받아 온 교육의 방식대로 자녀를 교육하고 사랑을 실천한다. 그래서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은 제가 받은 만큼의 방식대로 그 자녀를 사랑한다. 그래서 더러는 가슴에 넘치는 사랑을 살뜰히 챙기고 표현하는 방식이 서툴다. 부모 노릇도 초보로 시작해서 언제나 초행길이다. 그래서 서툴다. 우리는 누구나가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자녀를 키운다.
특히 내가 해보고 싶었던 것을 자녀에게 원 없이 해주면서 자녀에게 각별한 결과를 기대하지만 언제나 그것은 엄마 자신이 받고 싶었던 과거의 자신에 대한 보상적 바람이지 현재의 자녀가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녀들은 기대만큼 기뻐하지도 놀라워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오히려 퉁명스럽기까지 하다 “엄마가 왜 저러지?”하면서,,,,,
그래서 부모들은 이런 결과에 적잖은 실망을 하기도 하고 “내가 이런 환경에서 이것저것 다 배웠더라면 훨씬 훌륭한 인물이 되어 있을 것을.....” 하고, 푸념하는 것이 일반적인 부모의 입장이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도 아니고 과거의 현실도 아니다. 현실 속에 만들어 놓은 자신도 자녀도 괴롭히는 환상적 현실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이따금씩 나는 내 아이들과 분명 별개의 인물인데, 과거의 자신과 혼동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 애들에게 각인시킨다. “내가 이건 혼동하는 거다.” “이해해라.”라고. 하면서 정정, 부연, 설명을 덧붙이면서 대화를 지속한다. 부모와 자녀는 완전히 분화되어야만 보다 성숙한 가족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고 한다. 부모 자신이 먼저 과거의 자기 부모와의 관계에서 완전히 분화되어 성숙한 부모 역할을 수행하게 되면 자연히 자녀는 성숙한 부모의 부모역할을 배우고 따라 하면서 부모역할을 간접 교육받는다.
나 자신도 가끔씩 내 아이들에게 나의 존재를 감정 이입하거나 투사하는 나 자신에 놀라기도 한다. 내가 겪는 경험이나 체험을 표준인양 내 잣대로 내가 어릴 적 내가 받고 싶었던 바람과 희망을 자녀에게 대입시켜 내가 원하는 결과로 나와 주기를 바란다면 내 아이들은 한없이 고통스러울 것이다.
나는 요즈음 내 삶을 반추하면서 내 어릴 적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는지 반성하면서 그때의 불만을 현재의 내 아이에게 떠넘기는 잘못을 범하지 않는지 반성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행복을 누리는 기회도 제공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사랑하는 방법을 택한다.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내가 행복해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행복해야 타인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