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詩集『오늘 시』
푸른 명상
남해 허리까지 내려온 설흘산이
바람에 기대어 불덩이를 삭인다
다랭이 논마다 초록을 지우고
붉은 머릿결 너풀너풀 풀어놓는다
이랑의 가락에
느린 석양을 담은 수천 년
박속같은 삶은 물웅덩이에서 눈부시다
때로는 종류석이 되고
때로는 치맛자락 푼 풀등처럼
익숙한 계단을 밟은 업장들이
달랑달랑 주머니로 매달린
다랭이 논의 명상, 파묵칼레
남해에 간 적이 있다. 한 때 함께 글을 쓰고 희로애락을 나누던 시인이 귀촌했다는 남해에 낚시 겸 나들이 길을 나섰다 꼭 그 시인의 집을 방문하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그냥 지나는 길이 맞으면 한번 들러보려고 집들이 선물로 화장지와 세탁세제도 준비했다 거품처럼 부풀어져서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겨울 남해는 이듬해 봄을 준비하느라 땅들이 메말라 있었다 거기에 간혹 겨울 시금치들이 남아 있기도 했다 바다를 끼고도는 다랭이논은 충분히 시심을 자극하는 풍경으로 다가왔다 다랭이논을 지날 즈음 차를 도로변에 세우고 이런저런 사진을 찍고 한참을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소들도 오르내리지 못하는 저곳에 벼를 심고 비가 오지 않으면 오지 않는 대로 애를 태우고 비가 많이 오면 또 많이 와서 애를 태우고 심고 거두고 그 힘으로 자식들을 키우고 사느라 허리는 제대로 펴고 살았을까 한 번도 농사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다랭이논을 보면서 농부의 일하는 광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리고는 독일마을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국적인 집들이 있었고 깨끗했다 그곳에 사는 이들이 관광객들에게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말을 듣고 간 터라 그냥 조용히 지나왔다 먼 이국땅에서 고생하다가 가장 독일을 닮았다는 장소인 남해에 터전을 마련하고 안락한 노후를 보내는데 어떤 짐을 보태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내가 궁금했던 시인의 집에는 방문하지 못했다 차마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귀농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척 바쁘기도 했겠지만 아직 잘 정착을 하지 못한 것 같아 보는 마음이 서로 편치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아마도 자기 집 앞까지 와서 들어가지 않았던 걸 알면 무척 섭섭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든 오라든 그 말이 더 걸렸다 잘 살아내고 있는지 그렇지 못하다면 내 마음이 더 아플 것 같아서였다 결국 얼마지 않아서 제대로 정착을 했고 집을 새로 지었다고 곡 한번 들러서 잠도 자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라는 말을 들었다 이제는 맘 편하게 남해에 갈 수 있을 것 같다 가서 보고 싶은 마음들을 나눌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