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
가지런히 박혀 있는 숫자
기쁜 날 슬픈 날 달콤한 날 씁쓸한 날
모두 기록하며 함께 가는 친구
달랑 남은 달력 한 장을 만지면서
지난 날을 생각한다
가슴에 새기며 지나온 세월이
연이어 오늘이 되고
언젠가는 알게 될 거짓도 진실도
마지막 날에는 무엇이 될까 친구야
시집詩集 『서랍 속의 시詩』
새 달력을 건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마지막 한 장이 남았다 세월이 참 잘 지나간다 나이의 속도로 지나가는 세월이라는 말을 새겨 보면 그만큼 생각도 동작도 더뎌지니 어떤 일을 하는 속도가 느려지고 하나의 일을 완성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많이 드니 상대적으로 시간은 빨리 드는 셈이다
시간 대비 일의 속도가 늦다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늘 빠르게 움직여야 했고 쉼 없이 살아온 입장에서 보면 조금 천천히 흘려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도시인이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는 생각도 든다
또 같은 일을 반복하거나 특별히 어떤 다른 변화된 상황이 아니라면 시간은 빨리 간다 군에 다녀오지는 않았지만 '국방부 시계는 더디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가고 있다'라는 말을 새기며 군 생활을 끝냈다는 사람의 말처럼 자신이 바라지 않거나 무엇을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공간 속에 존재하면 비교적 시간은 더디게 흐른다
마찬가지로 더디게 흐르는 것은 빠르게 흐르는 것과 대조적이면서도 생의 곳곳에 얼굴을 숨기고 더불어 살아간다 우정이나 사랑 미움이나 절망과 같은 인간의 감정 속에 숨어 있기도 하다 빨라자라는 감정이 있는가 하면 더디게 자라는 감정도 있다
'정'이라는 것이 대표적으로 더디게 자라는 감정이 아닐까 희로애락이 다 묻어 있는 감정인 '정情'은 쉽게 만들어지는 것도 쉽게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미운 정 고운 정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진실한 정에는 대부분의 감정들이 다 뒤섞여 있다 특히 가족 간이나 오래 묵은 인간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달력은 가족은 아니지만 일 년 내내 24시간을 가족과 더불어 지낸다 그래서 사람이라면 별의별 생각을 할 것이고 훈수도 떨겠지만 사람이 아니니 입다물고 말을 않는다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고 있는 달력에 좋은 날 나쁜 날 즐거운 날 슬픈 날까지 일일이 적어 가슴에 꼭꼭 새겨주니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새긴 본인은 잊어도 달력은 한 번도 이런 날들을 잊은 적 없다
그런 점을 두고 본다면 달력을 향한 마음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건 달력이 아니라 인생을 향한 마음이고 내 삶의 궤적을 더듬는 일과 마찬가지이다 마지막 남은 한 장의 달력을 볼 때마다 늘 지난 시간들을 반성하고 생각하게 되고 시간을 되짚어 보면서 내가 잊고 지낸 날들을 기억해 준 고마움을 되새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