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주 달팽이
그가 지나간 길은 미끄럽다
뒤에 따라오는 이들이
상처 없이 지나가라고
수풀이든 나뭇잎이든 돌 밑이든 온몸 던져
걸림 없는 길을 닦는다
앞서 걷는 걸음이라 피부는 늘 따갑고 아프다
철없고 어린 너는 닦아놓은 길을 곱게 가거라
쌉쌀한 삶을 먹고 부드러운 길 내어 놓은 그는
얇은 막이 짓 찢기고 패각이 깨진 몸뚱이로
人無我에 든다
잘 닦여진 길은,
길이 아니라 살이 녹은 삶이다
열두 얼굴, 마음 비우는 연습이다
목숨줄 쥔 밥숟갈 내어주는 결단이다
아니, 느린 생 다 내려놓음이다
이 시는 식물을 좋아하고 앞뒤 베란다에 꽃을 키우면서 착상한 시이다. 지인이 준 식물에 따라온 듯한 달팽이가 그 해는 유난히 자주 나타났다 나무젓가락으로 집어 창밖 화단으로 던지면 또 나타나고 또 며칠 있으면 또 나타났다
나의 화단에서 연한 잎들을 귀히 여기는 꽃들만 꼭 찾아 몽땅 갉아먹고 줄기만 덩그러니 남았다 분명 달팽이 소행이다 저렇게 먹고 나면 또 알을 낳고 그 알에서 깨어나 비가 내리거나 습한 날이면 달팽이들이 줄을 지어 베란다 바닥을 기어 다녔다 그것이 저들의 삶인데 어찌하랴 보이는 족족 창밖으로 보냈다
그러던 어느 하루는.
그것도 커다란 달팽이가 앞서면 파릇파릇 깔끔하고 예쁘고 반짝반짝 빛나는 패각을 등에 업은 작고 귀여운 달팽이들이 뒤따르는 모습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앞서 기어가는 몸집이 커다란 달팽이는 패각이 찢어지고 깨어지고 낡고 힘겨운 모습이었다 어려운 삶을 헤쳐가는 어미들의 삶과 무척 닮아 있었다
어쩌면 그 시기의 나의 모습이라 여겼을까 내 공부하느라 비자발적 방임으로 반쯤 팽개친 자식들에 대한 너무도 미안함을 떠올렸다 자식의 입에는 좋은 것만 넣어주고 싶고 좋은 옷 좋은 길 수월한 길만 걷게 하고 싶어서 노력하지만 실상은 마음뿐, 지금 걷는 길에 대한 회의를 하면서도 디딘 길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던 마음. 그것 또한 자식을 둔 모든 어미들의 마음이라는 생각에 미쳤다.
사람뿐 아니라 미물조차도 자식 사랑은 다르지 않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달팽이 어미의 마음을 내 마음에 데려와서는 그 마음을 이입하여 시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