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내리기 2
2-1.
창에 부딪히는 빗물은 형형색색의 불빛을 머금고 있다.
가만히 얼굴을 대어보면 차가움이 뺨을 타고 이마로 오른다.
까만 밤이 아니다. 다리 건너의 야경이 멀리서 가물거린다.
다리를 건너는 버스의 흔들림에 졸음을 날려보려고 눈을 부릅 뜬다.
멍하니 바라보는 창에 오늘 낮에 찾아간 올케의 얼굴이 어린다.
힘들어 보이는 표정에서 그가 겪고 있는 아픔의 무게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조카들의 침묵도 동생의 아픔을 대변해 주는 느낌을 지울수는 없다.
그는 아직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지만 간간히 빠지는 혼수상태는 그의 상태를 알게해준다.
아득해지는 아픔도 아직은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이미 식은땀에 묻어나는 고통은 말로 할 수는 없으리라.
그의 기 빠진 표정에서 삶에 대한 희망을 놓아버린 어둠의 적막이 그의 정신에 파고 들었을 것이다.
생각이 생각을 부르고 있다.
올케의 유방암은 3년전에 시작되었다. 건강검진에서 유방암 초기 진단을 받고 00대학병원으로 진료를 받기 시작한 것이 3년전이었다. 그렇게 수술없이 방사선치료를 시작했다. 그리고 크기가 줄어들어 추적검사를 하기로 한것이 작년이었다. 처음에는 전이된 곳이 없다고 했단다. 그런데 암덩어리가 다시 커지기 시작하면서 림프로 전이가 되고 전신으로 퍼졌다고 한다. 그이의 표정은 고통을 넘어선듯 했다. 그렇게 고통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버스가 다시 흔들리고 다리의 끝을 통과하고 있다. 누군가 내리기 위해 벨을 눌러 버스안의 모든 벨에 붉은색의 불이 일제히 켜졌다. 드문드문 앉아있는 뒤통수에서는 아무런 생각도 읽을 수가 없다. 나처럼 머리를 창에 기대고 있는 여자의 뒤통수가 슬프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부르고 있을까?
다리가 끝나고 첫번째 정류장에서 젊은이가 우산도 없이 내린다. 그가 떠난 자리에 중년의 남자 둘이 올랐다. 배 나온 아저씨 하나와 키작은 아저씨 하나는 작업복차림에 장화를 신었다. 요즘도 장화 신는 사람들이 있구나. 검은 장화의 빗물은 버스 바닥에 자국을 내고 있다.
창밖의 풍경은 어느새 상가의 불빛으로 바뀌고 간판의 네온싸인이 저마다 잘난체하고 있다. 퍼런 이마를 드러낸 2층의 간판 불빛은 1층의 간판들을 누르고 있다. 이번 정류장에서는 아무도 내리지 않는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아마도 오늘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일기예보는 가끔 틀리기도 하는데 오늘은 아닌가보다.
시선을 멀리 보이는 고층아파트 지붕에 멈춘다. 아파트 상호를 읽고 싶지만 강한 불빛 뒤의 어두움을 지울수는 없다. 비에 젖은 아파트가 아파보인다. 어둠속에 빛을 내는 아파트의 창들이 너무 멀리 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도시는 오늘 비오는 낯선 거리가 되었다.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야 하는 나는 낯선 거리로 내려가기 두렵다. 그냥 이대로 버스에 머물고 싶다.
마음만큼 무거운 손으로 벨을 눌러 붉은 불빛을 불러온다. 천천히 일어서는 내 몸뚱이는 비에 젖은 솜뭉치다. 띡, 하차카드기의 소리도 멀리서 아득하게 들리는 느낌이다.
낮선동네, 낮선거리에 내려야 하는 느낌으로 비오는 거리에 발을 디딘다. 자동우산이 켜지는 소리도 아득하게 멀리 들린다. 매일 다니는 이거리가 비오는 배경 하나에 모르는 동네가 되는 것이 신기하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어색함이 묻어난다. 올케의 아픔이 이 동네까지 묻어왔다. 버스에 두고 내려야 하는 고통이 나를 따라 내렸다.
2-2.
우산을 받쳐든 손목이 시큰거린다. 9월의 비는 장마를 불러 온다. 비를 좋아하는 나지만 계속되는 비에 우울지수가 오르고 있다. 다른 표현으로 생각이 많아진다고 하지.
'생각은 생각을 불러오고, 또 다른 생각은 생각만으로 우울해지네.'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그냥 머리 속에서 맴돌고 있다. '생각'이라는 단어 하나에 생각을 또 하고 있다.
올케를 생각한다. 모자를 눌러 쓴 이마에서 비처럼 맺히던 땀방울. 멍하니 창밖을 보던 눈동자는 촛점이 없다. 무슨 생각을 하는거냐고 묻고싶지만 그러지 못한다.
병실 창밖에는 은행나무가 노란잎을 붙잡고 있다. 유독 은행나무가 많은 병원의 산책로에는 이때쯤이면 향기아닌 악취가 방문객들과 함께 병실로 들어온다. 신발에 묻어온 은행의 흔적.
내 생에 묻어온 사람의 흔적. 그 흔적들이 내 생에 붙어서 나를 이루고, 그 시간을 이루고, 내 감정을 이루고 있다. 올케도 그런 내 생에 묻어있는 한 사람이다. 신발바닥에 묻은 은행의 흔적만큼이나 나에게 강렬한 냄새를 묻히고 있는 그녀 이마의 빗방울이 나를 울리기에 충분하다.
울지 않으려고 애써 노래가사를 생각하다, 또 울컥한다. 이런날은 왜 슬픈 가사만 생각나는 걸까?
어느듯 동생이 올 시간이다. 병원의 이른 저녁시간이 동생이 올 시간임을 알린다. 이 시간에 저녁을 먹고 밤새 배고프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올케는 배고프지 않다고 한다. 그녀의 고통을 참는, 또 촛점없는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 본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핏기가 없다. 원래 하얀피부가 이제는 창백하다. 이마로 지나가는 푸른 정맥이 파란볼펜으로 그어놓은 선 같다.
"지금 안 먹으면 나중에 배고파."
"......"
음식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그릇들은 더 하얗게 보인다.
"소화 잘 안되는 것 같다고 죽으로 시켰는데, 몇숟갈이라도 먹자." 내 목소리가 약간 떨린다.
"녜." 그제야 작은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나온다.
숟가락을 쥐는 그녀의 손가락에도 이마에 있던 파란볼펜 자국이 지나가고 있다. 부어서 통통한 하얀 손가락이 숟갈을 힘없이 흐느적 거리며 잡고 있다.
"먹여줄까?"
"아니요. 그냥 제가 먹을께요."
퇴근을 하고 온 동생의 신발에도 은행의 냄새가 묻어왔다. 인사를 하고 구두를 벗어 화장실에 가져다 놓고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
"누나. 내일은 처제가 오기로 했으니 오지마." 동생의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없다. 이녀석은 자신이 선택한 여자의 아픔을 공감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가끔 너무 냉정한 그녀석의 표정이 '너는 감정도 없냐.'는 생각을 부른다. 며칠째 내리는 비가 생각에 생각을 부른다. 그만 생각해야 하는데, 생각은 왜이렇게 끊임없이 나를 찾아오는지. 생각없이 그냥 멍하니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골목에 들어서면서 생각을 멈추었다. 동생과 헤어져 버스를 타고 동네 앞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1시간 45분. 전화벨이 울린다. 동생번호다.
"여보세요"
"누나. 재우엄마 죽었어. 의사가 사망선언했어."
이게 무슨말이야. 2시간전까지 내가 밥먹겠냐고 물어 봤는데.
"언제?"
"방금."
동생의 목소리가 떨린다. 그도 이제야 실감이 나겠지.
"알았어. 지금 바로 갈께."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남편에게 전화를 하며 왔던 길로 돌아섰다.
신호가 한참 간다. '이 사람은 왜 전화를 안 받냐.' 속으로 또 생각한다. 어깨에 걸친 우산이 덜거덕 거린다.
"여보세요." 느긋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온다.
"재우엄마가 죽었데. 집앞까지 왔는데 다시 병원으로 가는 중이야. 자기도 챙겨서 병원으로 와."
그리고 대답도 듣지 않고 인사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버스를 탈까' 잠시 생각했다. 차도로 나오니 지나가는 택시가 눈에 들어왔다.
택시앱으로 택시를 불렀다. 바로 배차가 된다. 그리고 5분 거리에서 오고 있다는 안내가 화면으로 나왔다. 잠시 서서 생각해 본다. 이번 달에 생각을 너무 많이 했다. 아마도 평생할 생각을 이 한 달에 다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배차된 택시가 도착한다는 메시지가 휴대폰 화면에 떴다.
내 앞에 멈춘 택시에 몸을 싣는다. 버스를 타고 갔다가 버스를 타고 온 길을 이제 택시를 타고 간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 길로 택시를 타고 가는 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올케의 힘없고 촛점없던 눈동자와 파란볼펜이 그어놓은 이마의 정맥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