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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니야 May 30. 2024

왜, 내가..,

< 왜, 내가 >  1. 2. 인트로

1.

따뜻한 바람을 실은 바다를 옆에 두고 능선을 이루는 나지막한 언덕이 포근한 느낌의 그림 속 같은 풍경에서 그는 웃고 있었다. 그의 옆에 풍선을 들고 까르륵 웃는 아이의 웃음이 어렴풋이 멀게 느껴진다. 

복잡하진 않지만 사람들의 소리에 묻힌 놀이동산 같은 느낌의 풍경. 어딘지 익숙하면서 낯설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게 빛나는 하늘을 제외한 모든 것이 하얀색으로 칠해진 그림 같은 느낌이다. 길쭉하고 하얀 사람의 형체, 얼굴은 알 수 없지만 부드럽고 포근한 분위기의 사람들, 지구인이 아닌 느낌은 나만의 착각인가? 지상의 따뜻함과는 다른 익숙하지 않게 포근하다. 

그를 보는 내 눈에 웃음이 번지는 느낌으로 즐겁다는 감정이 얼굴을 가득 채운다. 

그와 둘이 걷는 하얀색으로 포장된 길. 바닷물이 햇볕을 반사해 반짝거리는 유리알 같은 느낌으로 포장된 하얀 길을 더욱 하얗게 만든다. 

그리고 따뜻한 햇빛. 나의 즐거움은 알 수 없는 나들이에 기뻐하는 어린 소녀의 마음이 되어 나풀거리고 있다.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포근함. 그때 그의 하얀 손가락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나지막이 자리 잡은 언덕을 오르는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도로의 끝에 초록의 선명함을 가진 나지막한 언덕의 중턱까지 쭉 연결된 어두운 색의 돌계단이 보였다. 그 계단을 혼자서 올랐다. 

어느새 그는 사라지고 없다. 아쉬움도 잠시, 어둑한 숲 속의 계단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르고 있었다. 계단은 나무에 덮혀 어두워졌고, 곧이어 동굴로 향했다. 

축축한 동굴의 습기가 코를 파고들며 서서히 추워졌다. 그리고 곧 나타난 우측의 편의점. 계단이 아직 끝나지 않은 중간지점의 평지에 뜬금없이 나타난 편의점에서 ‘무언가를 사야 하나?’ 생각으로 들어서려고 손잡이에 손을 얻었다. 

순간 내가 보인다. 문을 잡고 있는 나의 모습. 그리고 많은 사람들.

 눈을 떴다. 아득하고 이상한 기운에 잠시 멍하니 천장에 시선을 꽂았다. 

‘이거 뭐지? 요즘 스트레스 너무 심한가? 그 사람은 누구야? 외계인인가? 아니야. 성환이 같았는데. 그 사람이 왜 내 꿈에? 혹 죽었나?’ 

이런저런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난다. 

하지만 그 포근함은 몸이 기억한다.  

그 포근함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다리에서부터 따스함이 퍼져 올라와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지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지구가 아닌 느낌은 꿈이라서 그런가?


 2.

주섬주섬 챙겨 입은 옷에 머리띠를 챙기며 방을 나오니 냉랭함이 느껴지는 한기는 혼자라는 느낌을 더욱 진하게 한다. 

나는 혼자 산다. 혼자서 밥 먹고, 혼자서 산책하고, 혼자서 장을 본다. 혼자서 무엇인가 하는 일이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따뜻한 꿈에서 막 깨어난 지금은 혼자라는 것에 갑자기 쓸쓸하다. 

혼자서도 잘 살았는데 왜 이런 걸까? 어딘가 허전한 기분에 히터를 틀어본다. 

“공기를 따뜻하게 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너무 추운 것 같아.” 

머릿속으로 중얼거린 문장이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자그마하게 울리는 내 음성. 그렇게 시작한 아침은 평소와 같은 햇빛을 유리에 비추는 창밖의 풍경만큼 익숙하다. 출근을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휴일의 아침이 쓸데없이 맑고, 눈부시게 따뜻하다. 

겨울이 막 시작한 계절이 창밖에 머무는 햇살만큼 따뜻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휘잉 지나가는 바람이 창에 부딪히며 만든 덜컹이는 소리가 실내에 머무는 나의 마음을 쓰담이고 있다. ‘이런 날은 밖에 나가지 말자’ 내면의 소리가 머리를 지나갈 때, 문득 약속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낭패네. 이거 참.’ 시간은 9시를 지나고 있다. 약속은 12시 30분,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와의 약속은 왠지 어색하면서도 거절할 수 없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끌림이 그에게는 있다. 확실히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그가 나는 어색하다. 

그가 나를 좋아하는 것은 확실하다. 스물여덟의 나이는 연애에 대해 알 만큼 안다고 할 수 있는 나이다. 그동안 연애를 안 해 본 것도 아니니 그의 호의에 묻어있는 감정이 보이지 않을 리 없다. 그래, 준비를 천천히 하고 그의 점심약속에 가보자. 

커피메이커의 알림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는다. 커피를 그렇게 즐기진 않지만 선물 받은 커피메이커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즐겨마시진 않지만 커피냄새가 향긋하게 퍼지는 공간은 참 좋아한다. 천천히 커피를 마시기 위해 하나뿐인 탁자에 커피잔을 올리고 내 공간을 둘러보았다. 

현관문 앞의 작은 신발 벗는 공간, 바로 연결된 주방 겸 거실 역할의 작은 공간. 현관문 우측벽에 자리한 작은 싱크, 그 싱크 앞의 정사각형의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 싱크 옆의 화장실 문. 싱크를 마주한 큰 통창과 작은 발코니. 통창 우측의 방문 하나. 내가 거주하는 공간이 오늘도 작고 아담하다. 난 이 작고 아담한 공간에 혼자 있다는 사실에 안심한다. 

현관문과 약간 어긋나서 위치한 방문이 마음에 들어 이 공간을 선택했다. 현관문을 열면 눈에 들어오는 하얀 벽이 이 집에 처음 오던 날부터 마음에 들었다. 

이 하얀 벽에 해바라기 벽지를 포인트로 발랐다. 어두운 파란색의 배경에 노란 해바라기 꽃이 중앙에 하나 양옆으로 하나씩 세 송이다. 중앙의 큰 해바라기를 두고 원근법을 느끼게 하는 두 송이의 해바라기. 딱히 좋아하는 꽃은 아니지만 선택의 폭이 좁았던 그때, 가장 맘에 들었던 포인트 벽지였다. 지금은 그 해바라기 벽지가 왠지 멋있는 포인트가 된 것 같다. 

청소하기를 좋아하지 않기에 가구라고는 꼭 필요한 것만 배치했다. 그래서 입구에는 있는 신발장이 싱크와 테이블세트를 제외하면 전부이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생활하는 공간이면서 나의 쉼터이다. 난 이 공간에 누굴 들인 적이 없다. 약속은 밖에서, 함께하는 식사는 밖에서. 내가 고수해 온 이 공간을 지키기 위한 이 방법은 나름 내 성격과도 맞다. 

그렇게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없는 이 도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현재의 직장을 다니며,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람을 사귀는 일이다. 

난 친하다고 생각하여 나의 비밀이야기를 한 친구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다. 고등학교 때에 있었던 일로 이후의 나의 인간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사건이다. 

그녀와 나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만천하에 공개되었을 때, 난 죽고 싶었다. 아니,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 나의 분노가 폭발을 했고 난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행동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계단에서 밀려 떨어졌다. 그녀의 쇄골뼈가 부러지고 나서야 난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이야길 들었다. 

그래도 난 그녀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 비밀이야기는 나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였기에 그녀에 대한 분노와 내 부모에 대한 분노가 한꺼번에 그녀에게로 향한 것이다. 내 아버지는 그날 이후 나를 무슨 깡패처럼 대했고 내 어머니는, 아니 내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그 여자는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이 도시의 공과 대학에 입학을 하면서 그 집을 벗어났다. 물론 내 힘으로 자립을 한 것은 아니다. 나의 아버지는 집을 구해 주었고, 나의 어머니는 모른 척했다. 그리고 매달 아버지는 용돈을 보내주었다. 

나는 아주 당연한 듯 그 돈을 썼다. 왜? 그 돈을 받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난 아버지의 돈을 써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아버지의 유일한 친자다. 그래서 난 아버지에게 당당히 집과 돈을 요구했다. 그런 나에게 아버지는 작은 원룸을 추천했지만 난 방 2개짜리 전세를 추진했다. 그렇게 전세를 얻어 5년을 지낸 후 그 전세금을 빼서 지금 이곳으로 옮겼다. 

성년이 되었다는 이유로 난 아버지가 마련해 준 전세금을 내 돈으로 생각한다. 그래도 된다, 나니까. 아버지 돈은 내 돈이니까. 

하지만 그 돈이 내 돈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내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그녀 때문이다. 그녀는 내 이름으로 된 통장을 하나 보내왔다. 그리고 이것이 네가 받을 수 있는 아버지의 돈이라고 했다. 단어 선택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네 몫의 아버지 재산’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굳이 ‘니가 받을 수 있는 돈’이라니. 

그렇게 내가 졸업한 해의 5월에 그녀가 보낸 통장의 돈을 확인하고 난 그 돈의 절반을 현금으로 인출하고, 절반은 내가 만든 통장으로 이체를 했다. 그리고는 고맙다는 말은 안 하겠다고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고는 관계를 정리했다고 생각한다. 아직 나의 가족관계증명서에는 ‘모’로 등록되어 있는 그녀지만. 

그렇게 난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않은 아버지의 돈을 받았다. 어쩌면 그녀의 돈인지도 모르지만. 

이제 커피는 향기만 남기고 서서히 식어가고 있다. 

“나갈 준비를 해야지” 입 밖으로 생각이 또 불쑥 튀어나왔다. 

그래, 나갈 준비를 하자고 생각하며 보일러 컨트롤의 온수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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