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니야 May 24. 2024

그아이, 이상한 아이와 나의 서른.

내 생일이야. 꽃사와.

전화벨이 울린다. 그아이의 번호가 떴다. 병문안 다녀온지 일주일만이다.

병문안 후 회사에서의 갑자기 잡힌 출장으로 대전 거래처를 다녀오느라 그아이와의 연락을 하지도 받지도 못하고 일주일이 지났다.

"여보세요." 평소처럼 '응'이나 '왜?"가 아닌 '여보세요.'로 시작하는 내 목소리가 어색하다.

"......"

아무말도 없는 전화가 수상하다.

"여보세요."

"......"

그아이의 침묵이 갑자기 불안해진다.

"정미야. 왜 말 안해? 전화했으면 말해야지." 약간 불안해진 내 목소리가 나를 더 불안하게 한다.

"......"

"정미야." 침착하게 한 번 더 이름을 불러본다.

"... 소리가 잘 안나와." 속삭이는 듯한 그 아이의 목소리가 작게 들린다.

"병원이냐?"

"... 응."

약간 쉰듯하면서 살짝 갈라지는 작은 목소리가 속삭이듯하다.

"병문안 갈까?"

그아이의 속삭이는 듯 작은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나와버린 말이다.

"..., 내일 내 생일이야. ..."

"생일이야? 몰랐네..."

"선물사와. 병문안..." 내 말이 끝나기전에 그아이의 작은 목소리가 서둘러 말하고 멈추었다.

"알았어. 갈께. 선물 뭐 받고 싶어?" 내일이 금요일이라 반차를 내야겠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꽃 사와." 작고 짧은 그아이의 목소리가 흐느끼는 듯하다. 착각인가?

"너, 우니?"

"아니, 힘들어서..."

"성훈아." 그아이가 내이름을 뱉었다. 이상하다. 그아이는 내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 옛날 우리집에 오지 말라고 이야기할때 그아이는 "이제부터 너 이름 안부를꺼야.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존재도 없는 거야."라고 했다.

그 날 이후로 그아이는 내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그아이에게 나는 없는 존재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아이가 텔레파시를 보내는 것도 존재가 없는 존재에게는 그렇게 하는 거라고 했다. 그런데 그아이가 지금 내이름을 부른다. 이름을 부르면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야, 너 내이름 불렀다." 웃음 머금은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

"그래 성훈아, 잘 살아야 해. 이제 서른이야. 열심히 살아야 해."

목소리에 진지함이 살짝 묻어나서 어색하다.

"야, 니가 텔레파시만 안보내면 돼. 그러면 나, 잘살아." 진지함이 어색하여 텔레파시 이야기를 해본다.

"텔레파시 보내도 못 받잖아. 못 받아서 다행이지만."

"무슨 소리냐. 너가 텔레파시 보내면 내가 받는다면서."

"너 못 받는거 알아. 전부터 알고 있었어."

"헤, 못 받는거 알고 있구나. 그러면서 매일 보낸다고 한거야?"

"나는 열심히 보냈지. 텔레파시 보내느라 수명이 줄었어."

"텔레파시 보낸다고 죽지않아." 웃으면서 하는 나의 농담에 그아이의 웃음이 들리지 않는다.

작던 목소리는 좀 크졌지만 기운없는 느낌은 여전하다.

"너, 피곤하지? 목소리에 힘이 없어."

"응. 말하기 힘들어."

"전화 끊고 좀 쉬어. 내가 내일 병문안 갈께. 오전에 일 정리하고 점심때 쯤 출발할꺼야."

"응. 내일 보면 내가 중요한 이야기해 줄께." 여전히 기운없는 목소리로 말하고 전화가 끊어졌다.

이상한 전화 내용이다. 뜬금없이 전화해서 생일이라고 꽃을 사오라고 한다. 그래, 아프면 그런 생각도 나겠지. 특히 생일이면 그럴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텔레파시와 수명이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나는 한번도 그아이의 생일이 궁금하지 않았다. 그래서 생일에 대한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난 한번도 그아이에게 생일이 언제이냐고 묻지 않았고, 그아이도 생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물론 내 생일에 관해서도 묻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 새삼 생일을 말하다니, 그아이가 많이 아프긴 아픈가보다.

나는 내일 일정을 검토하니 충분히 오전에 일을 마칠수 있을 정도였다. 내일 그아이에게 꽃을 사서 가야겠다 생각하면서, 내가 그아이에게 꽃선물을 한적이 있었던가 생각했다. 꽃선물 뿐 아니라 선물이라고는 한적이 없다. 가끔 뭘 사준적은 있으나 선물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내일은 꽃선물을 받고싶다는 그아이에게 꽃을 사줘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버스가 출발하려면 5분 정도의 여유가 있다. 좌석에 앉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입가에는 슬그머니 웃음이 새어나온다. 오후 반차를 사용하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출근하여 바로 신청서를 제출한 후 서둘러 일을 정리하였다. 어차피 이번 주 일들은 거의 정리가 되었고, 나머지는 다음주로 넘어가는 일들이라 과장도 양해를 했다. 특히 친구가 아파서 병문안 가야한다는 이유에 대해 몇개월전 심하게 아파 입원했던 과장도 깊이 묻지 않았다. 다만 '친한 친구냐?'는 그의 질문에 그냥 "녜. 어릴때 친구예요."라고 한것이 오해를 불러 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틀림없이 내친구인 그아이가 남자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여자아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고, 묻지도 않았다. 어차피 현재 여자친구가 없는 나에게 그아이가 여자라고 하는 순간 쏟아질 오해가 귀찮기도 해서 굳이 밝히지 않은 것이다.

버스가 터미널을 벗어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린다. 그아이다. 언제 출발하는지 이야기하지 않아 전화를 했다는 생각을 하며 무심히 통화버튼을 누른다.

"여보세요. 박정미님 지인분 되시지요?"

"녜, 그렇습니다." 그아이의 전화로 걸려온 낮선 목소리에 갑자기 심장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많이 아파서 옆 침대의 환자나 보호자가 대신 전화를 걸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며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박정미님이 이 번호로 연락해 달라고 해서 전화드렸습니다." 약간 나이든 목소리라는 생각에 저번에 봤던 옆 환자의 보호자라는 생각을 한다.

"녜에."

"..." 전화기 너머 잠시 침묵이 흐른다.

"말씀하세요. 무슨 일이지요?"

"저는 박정미님이 입원한 중앙병원 간호사입니다. 박정미님이 부탁해서 전화드렸습니다."

간호사가 그아이를 대신해서 전화했다고? 상태가 안좋아졌나보다 생각하니 살짝 진정된 심장이 다시 빨라지기 시작한다.

"아, 그러세요." 무슨일인지 궁금하지만 습관적으로 뱉어진 말이다.

"박정미님이 30분쯤 전에, ... " 잠시 뜸을 들이는 상대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음을 알려주는 분위기다.

"12시 45분에 의사선생님이 사망선언을 하셨습니다." 조심스럽지만 담담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린다. 갑자기 빠르게 뛰던 심장이 배꼽쪽으로 모이는 느낌이 들며 숨이 안쉬어졌다.

"에?"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 내 목소리가 아득하게 내 귀에 머물러 당황스럽다.

"가족분들에게도 연락되어 오시고 있는 중입니다. 박정미님께서 본인에게 무슨일이 생기면 이 번호로 꼭 연락 해달라고 오늘 아침 일찍 저에게 부탁했어요. 어젯밤부터 상황이 별로 좋지는 않았어요. 아마도 본인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아침에 출근하자 정신이 있을때 부탁한다고 말하며 전화기 비밀번호도 알려 주면서 말했어요. 그리고 보내달라는 녹음메시지가 있어요. 지금 보내드릴께요."

쉬지 않고 말하는 그녀의 평범한 말투는 잠깐 병실밖을 나갔다가 들어오는 환자를 이야기하는 분위기였다. 그 환자가 조금있으면 들어오니 잠깐 기다리면 된다는 그런 내용을 말하듯이 그아이가 나에게 연락하라고 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전화 내용은 그아이가 30분쯤에 죽었다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자 심장에서 시작한 통증이 팔로 뻗어나가는 느낌이 들면서 손이 떨렸다. 그렇게 빨라지는 심장박동수와 함께 숨이 가빠졌다. 내 숨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내귀에 들린다.

"잠깐만요. 그러니까 12시 45분에 정미가 죽었다는 건가요?"

"녜, 담당선생님이 사망선언하셨구요. 지금 부모님 도착하셨습니다."

"아~."

"메시지 보냈으니 확인해 보세요. 전하라는 내용 전달 다했으니 전화 끊겠습니다." 차분한 목소리가 잠시 들리지 않더니 전화가 끊어졌다.

버스 창밖으로 고속도로 방음벽이 지나가고 있다. 방음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통화내용을 생각해본다. 다시 심장이 빠르게 뛴다. 그리고 머리속에는 온통 '정미가 죽었다고?, 정미가 죽었어. 정미가 죽었다네.'하는 말이 뱅뱅돌고 있다.

 결과 물어보라고 전화하라고 했을 때 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나는 그아이의 병명도 모른다. 어떤 병으로 죽어갔는지 모르고 있다. 간이 뚱뚱해졌다고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니, 아니 다른 병이 또 생긴걸까? 아니야. 뭔가 내가 모르는 다른 것이 있는 걸까? 도대체 무슨병인거야? 그날은 그냥 간이 안 좋을 걸로만 알았는데... 간이 안좋아서 돌아가신분이 내 주위에 있던가? 아니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간이 안 좋아 돌아가신분이 누구지? 간이 안좋다고 다 죽지는 않는것 같은데. 왜?

어제 저녁, 그아이가 전화기에 대고 힘들게 말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코끝이 찡하며 양쪽 이마가 아파진다. 그아이가 말 없이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는 생각과 그 흐느끼는 목소리가 아무렇지 않은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심장이 다시 배꼽쪽으로 모이는 느낌이다.

아, 오늘이 생일이라 했는데, 생일이라 꽃선물 받고 싶다고 했는데. 서른이 되는 생일날 12시 45분에 그아이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화를 통해 알게되었다는 사실이 왠지 현실이 아닌 느낌이다. 이제 서른인데. 나도 이제 서른인데. 그아이도 서른인데. 겨우 30년 살았네. 겨우 30년. 어제 전화했던 것이 서른 생일을 알리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아파서 죽을 것 같다는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그아이는 어릴때부터 이상한 아이였다. 그래서 죽어가는 날에도 나에게 정확하게 어떤 사실을 이야기한것이 아니다. 그아이는 중요한 말을 해준다고 했다. 그 중요한 말이 무엇일까?

간호사가 보내준다는 메시지가 있었다. 그아이와의 톡창에 음성메시지가 하나 들어와 있다. 궁금하기도 하지만 지금 보면 안될것 같기고 하다. 음성메시지를 들어보려고 이어폰을 찾았지만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났다. 나중에 혼자서 들어야 할것 같은 생각이 들어 톡창을 닫았다.

고개들어 바라본 창밖의 풍경은 여름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하늘은 오늘따라 더 맑고 파랗다. 멀리 보이는 산의 초록도 여름을 즐기고 있다. 복잡한 머리속의 말들과 상관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눈에 시골의 풍경이 들어온다. 어느새 초록이 여름의 끝을 붙잡고 있는 들판과 멀리보이는 산이 물에 젖어 아른거린다.




이전 10화 그아이, 이상한 아이와 나의 서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