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우울이란 무엇일까
문득, 내나이가 머리 속에 내려 앉았다. 바쁜 생활 속에서 잊고 있었던 나의 나이가 자꾸만 떠오른다. 나이 계산이 잘 안되고, 그런 나이 계산이 아무 의미 없었던 시간들이 있었는데, 요즘은 내 나이가 자꾸만 머리속을 맴돌고 있다. 이런게 나이들어 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나이라는 것이 왜 이렇게 자꾸 생각날까?
작년, 희망을 가지고 도전했던 일들을 올해초 여러가지 이유로 포기하게되었을 때, 자신에게 실망을 많이 했다.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면서 나의 선택들이 어리석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말로는 '그럴 수도 있지' 라고 했지만 우울해지고 의기소침해지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상태에서 '섣부르게 행동하다 망했다'라는 생각을 안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상태를 만들어 버린 나에게 너무 짜증이 나고, 힘들었다. 다시 바닥에 내팽개쳐진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이 지금 회복된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막연하게 어쩔 수 없었다고 합리화했던 것들이 지금은 아예 더 나빠진 듯하다. 아니, 그때보다 더 의기소침하고 우울하다. 한동안 글도 쓸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글을 쓰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더구나 이런 우울한 기분들을 쏟아낼까봐 시작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욱 우울하고 더더욱 의기소침해질것 같아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 발행할지도 모르는 글을 써놓고 지내보자' 하는 마음이 든것이다.
그렇게 우울하지만 별 생각없었던 2월 말에 대학에서 강의를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언제인가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일이라 덥석 승낙을 했다. 급하게 준비를 해야하지만 실습이 걸린 4학년 과목이라 4월부터 더블강의를 하게되는 스케줄로 준비할 시간이 한달 반 정도 있었다. 그 3월에 준비를 하고 4월부터 강의가 시작되고 6월 기말고사까지 숨차게 지나고, 기말고사가 끝나고 성적정리까지 마무리하고 난 지금, 현실의 내가 보인다. 그리고 생각이 많아지게 되었다. 이것 저것 생각을 하게 되면서 미루어 두었던 우울감이 다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시간이 약이 되려면 얼마나 더 지나야 할까? 내 나이에는 6개월이란 시간으로는 약이 되지 않는걸까? 젊은이들의 6개월은 극복하고도 남을 시간일텐데, 지금의 나는 다시 떠오르는 상실감과 우울감에 빠져든다. 이런 감정에 끌려가면 안되는데 하는 생각과 함께 우울해지는 감정을 몰아낼 수가 없다. 이제 그렇게 '긍정적인 감정들을 끌어 올리기에는 너무 늙어 버린걸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이들면 모든 것이 느려진다는데 감정들도 느려진걸까? 점점 나이를 느끼며 소심해지는 내가 한심하지만 밀려드는 소심과 우울, 상실감을 말릴 수가 없다. 한편으로는 상실감에 신경쓰면서도, 생각을 많이 하고 이것저것 참견하고 관리하던 부분 없이, 그냥 현재의 시간에 주어진 일만 해도 되는 지금의 이 상황이 편하다는 생각도 한다. 신경쓰야 하는 부분으로 골머리 싸매며 아파하지 않고, 세상일이 내 맘 같지 않다고 짜증내지 않고, 저 사람의 태도를 내가 어디까지 관여해야하나 등등의 여러일들을 책임지지 않고 이것저것 궁리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마음은 편안하지만 어쩐지 ... 그렇다.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요즈음의 내 마음이 어떤것인지 나도 잘 모른다. 한편으로는 편안하면서, 한편으로는 우울해지는... 오늘이 나의 58번째 생일(글을 쓰던 당시)이다. 그래서 더 더욱 이런 우울감이 나를 묶어 두는걸까? 맛있는 고기도 먹었고, 가족들이 축하도 해 줬지만 어딘지 허전한 것은 먹은 고기를 소화하지 못하고 3시간쯤 후에 배가 아파 설사를 한 나의 예민한 장운동 때문일까?
2023년, 올해 초 코로나 환자들을 돌보면서도 감염력을 지켰던 내 몸이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무너졌다. 코로나에 감염되고 격리가 끝난 후에 입안이 까끌해지며, 한 동안 맛을 느끼지 못했다. 혓바닥이 두꺼워 진 느낌이 들어 양치할 때 혓바닥을 박박 문지렀었다. 그래도 맛은 돌아오지 않고 짠 맛과 매운 맛은 통증이 되어 혓바닥을 자극했고, 기름진 음식을 먹고난 후에는 어김없이 설사를 했다. 내가 좋아하는 육고기가 쳐다보기 싫어져 우리집 냉장고는 채소화가 되어갔다. 그렇게 좋아하던 탄수화물 덩어리 밥도, 빵도 손이 선뜻 가지 않았다. 어느날 막내가 '엄마, 냉장고에 고기가 없어.'라고 했을 때 열어본 냉장고에는 쌈추와 양상추, 쌈배추가 가득했고, 고기라고 부를 수 없는 어묵이 있었다. 그때 부터 내가 먹지 않더라도 냉동 삼겹살과 햄등을 샀다. 예전에는 아침부터 삼겹살을 구워먹을 정도로 좋아하던 나 였는데, 이제는 아이들의 식성을 고려하여 삼겹살과 햄, 너겟등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스트레스는 이렇게 사람을 변하게 하는걸까? 아니면 코로나라는 병에 감염된 후의 내 세포들에 변화가 나를 바꾼 것일까? 그렇게 코로나라는 병은 나의 식성을 바꿔 놓았고, 나는 '죽을때가 되면 변한다는데...'하는 막연한 생각을 한다.
그렇게 나는 우울하다. 그러던 어느날 모임자리에서 선배가 앞에 않은 다른 사람에게 'ㅇㅇ(내이름)이 강의를 하더니 성격이 차분해진것 같아. 교수님이 되어서 그런가'라고 하는 말을 지나치며 들었다. '아! 나의 우울한 기분이 어쩌다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드러나는 그런 변화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우울은 차분해진것 같은 모습으로 타인들에게 보여지고 상황의 변화와 겹치면서 그렇게도 표현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사람은 항상 변한다. 예전의 내가 좋았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 자신감 넘치는 단호한 말투와 질문에 대한 거침없는 답변이 나를 똑똑한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면, 이제는 말 수가 적고 생각이 많은 학자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그 선배의 평가가 나의 우울감을 합리화시키는 포장하는 좋은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하늘 높은줄 모르고 잘난척 하면 모든 일이 내 손안에 담겼다는 자만심을 실패를 통해 좀 더 신중한 판단을 하는 자신감으로 바꿔야 할 때인 듯 하다. 그러나 나의 이 우울감은 한동안 지속될 것이고, 이 나이에 이 우울감을 극복하고 나면 60이 넘은 나이의 자만심 가득한 꼴불견의 늙은이가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지만, 난 지금의 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우울감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켜야 한다는 사실은 자각하고 있다. '이 우울감에 휘둘리지는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몇년을 더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 몇년이 지나면 나는 어떤 늙은이의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고 있을까 생각해 본다. 인생의 우울은 실패와 창조의 두 얼굴의 내면인 것을 알고 있다는 사람처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나를 다독여 본다. 그래서 어느날 문득 우울한 나를 발견하고 우울에서 벗어나야하는지, 이 우울을 안고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이렇게 긁적일 수 있다는 것은 어느정도 우울에서 한 발 물러나 섰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오늘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며 내 마음을 정리한다. 또 언제 어떤 얼굴로 마주하게될 우울이 내 인생에 얼마나 더 있을까 생각해 보면서 말이다.
Aug-5.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