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국수 면은 느리게 익었다. 나와 정은 그저 창 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버렸다. 시간은 침묵을 가르는 베일이 되어 정과 나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나는 침묵을 버티기 위하여, 정과 멀어지지 않기 위하여 더욱 기발한 유머를 내놓았고, 그러면 정을 하하 웃어대었다.
그렇게 칼국수를 맛있게 먹어치우고는 우리는 식당을 벗어나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서 더욱 수다를 떨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렇기보다는 커피를 포장해서 집으로 가는 길이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에너지를 다 써버려서 정에게 더 나눠줄 에너지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정을 한 번 더 웃기기 위해 또 다른 언어유희를 시도하고, 정의 반응을 살펴대었다.
그렇게 나의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정을 웃긴 다음에, 나는 정과 커피를 테이크아웃하고 각자의 길로 갔다. 정으로부터 고개를 돌리자마자 나의 표정은 굳었다. 정이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는 정을 좋아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나의 가식적인 모습이었다.
가식적인 것이 맞는지, 혹은 내 진짜 모습이 이런 건지는 나도 구분하지 못했다. 나는 매일을 무기력과 함께 보냈지만, 친구들은 나를 유쾌한 아이로 알고 있었다. 나는 유머에 자신이 있었고, 친구들을 만나기를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이 끝난 이후에는 썩어버린 얼굴을 하고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스스로를 충전하였다.
이런 나의 모습에 대해 혼란을 느끼면서도 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그만두지 못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려고 애를 쓰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나를 소진해가면서, 나는 타인의 연료가 되어 갔다.
이런 나를 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상담을 할 때에 이에 대해 논의해보기도 한다.
"음, 그래서 동호 씨는 자신이 내향적인지 외향적인지 잘 모르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정신과 김 선생님이 말했다.
"네, 사람들 사이에서 있는 것도 좋아하고, 텐션이 올라가는 것도 좋아하는데, 제가 정말 외향적이라서 그렇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오히려 남들에게 맞추어주기 위해 외향적인 나 자신을 꾸며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대학 동기와 샤브샤브를 먹을 때도 농담을 하시면서 회의감을 느끼셨던 거고요."
"네, 스스로 연극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극이요?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음, 그냥 호감 가는 '나'라는 사람을 연기하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좋게만 포장하는 것만 같았어요."
"그렇군요. 제가 보기엔 동규 씨께서 그런 자신에 대해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 같네요. 이 혼란에 대해서 더 파헤쳐보아야 할 것 같아요. 동규 씨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야 더욱 더 치료에 전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네, 알겠어요."
김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나의 미스테리는 풀리지 않았다. 나는 집에 돌아가 준호와 밥을 먹으면서도 내 '연극'에 대하여 생각한다.
소설 '인간실격'의 주인공은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을 두려워하여 오히려 광대 역할을 자처한다. 타인을 웃기고, 타인의 호감을 사면서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스스로를 잃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이제 침묵을 유지하기로 다짐한다. 타인과의 대화에서 '마'가 떠서 어색한 상황에서도 침묵하기로, 내 자신의 중심을 잡고 굳이 가벼운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잘 되지는 않는 새로운 습관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요즈음에 정신과를 다니면서는 긍정적인 이야기를 선생님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죽고 싶다.','그만두고 싶다.'와 같은 문장으로 선생님에게 부정적 에너지만 전파했다면, 이제는 내가 어떤 부분이 나아진 것만 같고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고 미래지향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런 나의 변화를 긍정한다. 긍정하면서도 아직은 아쉬운 부분이 있다. 나는 더더욱 흔들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요즘은 진로에 대해 고민하면서 과거를 돌이켜 볼 때가 있다. 작년에 회사에서 일하면서는 여직원 두 분이 타인을 뒷담화하는 것이 나의 신경을 너무 건드려서 예민함이 증폭되었었다. 그 때 내 자리에서 10m 쯤 되는 위치에서 그들은, 누군가를, 혹은 나를 뒷담화하였고, 그 소리에 나는 귀를 쫑긋하며 세금계산서를 발행해야 했다.
나는 그들이 욕하는 대상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실은 나일까봐 두려워했다. 나는 점차 예민해졌었고, 끝내는 큰 사건이 터진 후 나는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도피한 것이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면서 내가 도망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내가 부끄러웠고, 1인분을 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파왔다. 처음 도전해보았던 사회생활은 실패로 끝났었다. 물론 큰 이유가 있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