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닻을 내리지 않은 배처럼 나는 계속하여 파도 위에서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어느 날은 컨디션이 좋았다가도 어느 날은 귀신 같이 바닥을 찍었다. 나는 이런 나 자신을 조절하지 못했고, 나 자신을 조절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나는 일상을 계속해나가면서 학교에 다니고, 친구를 만나고, 준호와 놀러 다녔다. 그렇지만 내 안의 무언가는 항상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꿈틀거리는 마음을 뱃속에서 느끼면서 지쳐갔다.
시간은 흐르고 흐른다. 나는 주에 종로와 이태원에 가서 친구들을 보고, 남자니 세상이니 하는 이야기를 떠들며 같은 나날을 보냈다. 중간고사가 다가오면 공부를 했고, 시험이 끝나면 미친 듯이 놀았다. 나는 그렇게 표류했다. 나에게 비전이니 미래니 하는 것들은 계산 안에 없었다. 나는 다른 대학생들은 취업 준비를 한다고, 자격증 시험을 공부하거나 학점을 관리한다거나 하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나는 믿는 바가 있었다. 나는 세무학과에 다니고 있으니, 언젠가는 세무사 시험을 볼 것이었다. 그게 필수는 아니지만 의례에 가까운 코스였다. 나는 먼저 고시 준비에 뛰어드는 친구들을 보며 군 입대를 기다리는 20대 초반의 청년처럼 미래를 두려워했다. 사실 미래가 두려워할 만한 것인지는 나도 잘 몰랐다. 막상 공부를 시작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마냥 열심히 공부를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나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면서도 매일매일에 골몰하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내가 계속해서 반복하던 생각의 길이는 하루 이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내일 아침 몇 시에 일어나서 몇 시에 조깅을 하고, 몇 시에 친구와 만나고 몇 시에 잠에 든다. 이런 싸이클을 반복하며 나는 인생을 살아갔다. 몇 년 뒤의 미래는 없었다. 몇 년 뒤면 나는 무얼 하고 있을지, 훌륭한 어른이 되어 있을지 혹은 고시 낭인 혹은 실패자로 인생을 마감하였을지 나는 두려웠지만, 노력하지 않았다.
변명하자면, 하루하루가 버거웠기 때문이다. 삼 일이 있다면, 나는 이틀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심장이 빨리 뛰거나, 긴장되거나, 무기력하거나, 손발이 차갑다거나, 버거운 기분이 들었다. 막상 기분이 좋은 하루가 다가오면 사흘 간 해야 했던 작업들을 열심히 하느라 시간을 보내고는 하였다. 인생을 허비하고 있었다. 나는 달려야만 했다. 달리기를 하려고 준비하였는데 출발 신호가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웅크린 자세로 평생 내 인생이 제대로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선수가 된 것만 같았다.
그저 나를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은 준호였다. 준호는 주에 한 번 나를 서울의 어느 곳에 데려가 주었다. 홍대, 한강, 중랑천, 이태원, 경복궁 등 서울의 각종 장소들을 놀러다니며 나는 숨을 쉴 수 있었다. 준호와 같이 나란히 걸으면서, 손은 잡지 못하지만 서로를 쳐다보며, 나는 맑은 날씨 속에 있었고, 흐린 구름 밑에서도 따뜻할 수 있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인생에서 제일 많이 놀러다녔을 때가 아니었나 싶다. 경기도에서 자란 나는 서울에 대해 묘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는 곳, 높은 건물과 멋진 사람들이 있는 곳, 서울은 나에게 범접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런 서울을 준호와 같이 도장깨기하고 나니, 세상 사람들 사는 것이란 다 똑같은 것이었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똑같다는 말이 진정으로 그들이 다 똑같이 산다는 말은 아니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성소수자로서 남자를 껴안고 자는 것을 좋아했고, 지금은 준호와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몸을 부대끼며 살아왔다. 남들이 보면 이상하다고, 특히 호모포비아들이 보면 역겹다고 할 만한 삶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그들에 개의치 않는다. 예전의 흔들리던 나였다면 그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혔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들을 신경쓰지 않는다.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고, 그들은 그들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나는 흔들리면서도 균형을 찾아갈 것이고, 그들은 완벽한 그들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나는 나답게, 그들은 그들답게.
요즘 나는 살을 빼고 있다. 항우울제를 복용하면서, 혹은 의지 박약으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폭식하는 습관이 생겨버린 나는 살이 엄청난 속도로 쪄버렸다. 마침내 남자가 아닌 여자 기준 비만의 체지방률을 받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헬스장에 등록하고 PT를 받으며 식단을 트레이너에게 보고하고 있다.
나는 많이 먹는 만큼, 살이 금방 빠지는 체질이다. 살이 금방 빠지는 만큼, 혹은 더더욱 얼굴 살은 급격하게 빠지는 편이다. 다이어트를 시작한지 한 달만에 나는 7kg감량에 성공하였고, 준호는 이런 나를 질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요즈음 준호는 나의 뱃살을 보며, 내 접혀버린 팬티 고무줄을 보며, 나를 돼지라고 놀리는 것에 맛을 들였었다. 그렇지만 금세 배가 줄고, 얼굴은 살 찐 티도 나지 않을 정도로 말라진 나를 보며 준호는 왠지 모를 경외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이제는 내가 준호를 돼지라고 놀렸다. 준호는 술을 좋아했기 때문에, 술 자리에 자주 갔고, 일정 몸무게 이하로 살을 빼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돼지라고 놀리며 살게 되었다.
"돼지!"
"뭐 이 돼지가"
이런 식으로 서로를 놀리는 것이 우리의 낙이 되었다. 나는 살이 빠지고 있음에 감사했다. 내가 그를 놀릴 일이 그가 나를 놀릴 일보다 훨씬 많아짐에, 그리고 이런 삶이 계속될 수 있음에 감사하였고, 살이 빠짐에 따라 다시 내 얼굴의 턱선이 돌아옴에도 감사하였다. 그리고, 내가 다시 정상 항로를 되찾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흔들리더라도 삶은 나아간다. 소수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죽으라는 법은 없다. 나는 아득바득 이를 갈며 인생을 버텨내왔다. 준호의 손을 잡고, 불어오는 바람에 맞서 버티고 서 있었다. 살이 찌고 빠지는 과정처럼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이 내 인생을 흔들었었다.
작년 6월에 나는 파견직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압박과 나도 이제는 일 다운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지원해본 일자리였다.
학교는 한 학기 정도 휴학하기로 했다. 나는 군 휴학을 제외하고는 휴학해본 적이 없었기에, 선택할 만한 길이었다. 휴학신청을 누르고 문자로 휴학신청이 완료되었다는 메시지를 받자, 내 삶이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은 예전부터 쭉 변화해왔지만 나는 삶에 저항하는 편이었다. 예전부터 나는 변화를 두려워했었다. 1년이 흐르고 새로운 아이들과 반이 되는 것이 두려웠다. 새로운 과목을 배우고, 적응해야 하는 것이 두려웠다. 기존의 안락한, 혹은 적응해버린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이 싫었다. 마치 벌거벗은 채 집 밖으로 쫓겨난 기분이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스스로 일 경험을 쌓기로 한 것은 나름 기특한 일이었다. 수동적으로만 살아왔던 내가 마침내 세상의 등쌀에 밀려 적극적인 태도를 택할 때가 되었다고 누군가 나에게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출근 전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출근했다.
회사는 신설동에 있었다. 신설동으로 버스를 타고 가며 나는 신설동은 회색 도시라고 생각했다. 건물이며 건물이 다 회색빛으로 바래 있었고, 날씨도 우중충하니 회색 구름이 하늘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사무실에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새로 파견직으로 근무하게 된 김동호입니다."
그들은 거의 나를 신경쓰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만이 "아 새로 온다고 했던 파견직?"하며 반응을 보였을 뿐이었다.
나는 급박하게 실무에 투입되었다. 인력부족으로 골치를 앓던 회계팀에서 급박하게 요청한 인력으로 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하는 일은 전자세금계산서를 발행하고, 매일매일 세금계산서 발행 분과 입금 내역을 비교하고 정산하는 일이었다. 나는 인수인계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바로 일을 시작했다.
회계 프로그램으로 금액과 업체를 매칭하고 전자세금계산서를 발행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실수하면 처리하는 데 품이 많이 들기 때문에 나는 신경이 곤두선 채로 몇 번이고 확인한 다음에야 전송 버튼을 눌렀다.
물론 내가 여러번 확인하였다고는 해도 실수는 있기 마련이었다. 수정세금계산서를 발행할 때마다 나는 귀가 빨개지고, 죄스러운 마음에 고개는 숙여진 채로 선임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괜찮다고, 그럴 수도 있다고 이야기해주었지만, 나는 일을 완벽하지 못하게 처리한 것에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웠고, 그들도 바쁜 와중에 내가 실수를 하면 표정관리를 완벽히 하지는 못하였다.
나는 점심시간이 되면 식사를 따로 했다. 사무실 직원들은 친한 사람들끼리 같이 식사하러 나갔으나, 파견직으로 외딴섬처럼 사무실에 들어온 나에게는 친한 사람도, 또래도 없었다. 다들 30대 중반은 넘긴 직원들 사이에서 나는 어울릴 사림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애시당초에 그들과 같이 식사하려는 마음을 접었다. 어차피 회사 안에서 불편한 사람들끼리 오순도순 친한 척하며 소화불량을 겪느니 혼자 식사하고 돌아오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회사 근처에 서브웨이가 있어, 나는 주로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웠다.
점심에 참치가 가득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고 커피를 하나 포장해서 성북천을 걸어다니면 심신이 안정되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산책했다. 스마트 워치로 타이머를 맞춘 채였다. 1시간의 점심 시간 동안 식사, 커피 포장, 산책까지 마무리하려면 산책에 20분 정도밖에 투자할 시간이 없었다.
산책을 하며 나는 예민해진 나의 신경을 누그려뜨렸다. 들숨과 날숨에 점차 돌아오는 안정에 나는 안심했다. 타이머로 맞춘 10분이 지나면 또 10분 동안 길을 돌아와 회사로 복귀했다. 그리고 남은 5시간을 어떻게 때울지 생각하였다.
내가 하는 일은 주로 오전에 바빴고, 오후에는 여유로웠다. 이 또한 날짜에 따라 달라졌지만, 주로 오후에는 2~3시간 정도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그렇지만 나는 사무실에서 여유롭게 쉬지는 못했다. 그들의 눈총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래서 인터넷 기사를 보고, 관심도 없는 물건들을 아이쇼핑하면서 시간을 때웠다. 지루한 시간이었다. 차라리 일이 8시간 내내 있기를 바랐다.
또 카카오톡으로도 시간을 때웠다. 대학 동기들, 이쪽 모임들, 그리고 준호와 카톡하였다. 준호는 카톡을 나누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짧게 짧게 얘기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제 같이 살고 있는 상황인데 연락까지 열심히 할 필요는 굳이 없었다.
준호와의 카톡은 이런 식이었다. "점심 잘 먹었어?""ㅇㅇ 뭐 먹음.""나는 오늘은 머시기머시기했어.""나는 뭐뭐를 했어.""그래 나 이제 좀 쉬러 갈게 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