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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ELJAZZ Oct 23. 2024

난기류 11

초진, 산책

 모든 게 그렇게 나아지는 줄로만 알았지만, 나는 내 안에서 무언가 비어있는 것을 느꼈다. 몸이 좋아지고 있었고, 살도 많이 빠졌고, 건강한 음식을 먹었다. 그런데 나는 무언가 빠져있었다. 나에게는 어떤 것이 결핍되어 있었다.
 준호는 그것이 우울이라고 했다. 내 안에 무엇이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차지하고 있다고, 그것의 이름은 우울이라고 했다. 나는 부정하였다. 나는 내가 우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그저 가끔 공허해지고 가끔 무기력해질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준호는 강하게 나에게 정신과를 가라고 이야기했다. 그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도 옆에서 지켜본 내가 시들어가는 것만 같아서, 내가 침묵을 지키고 죽은 눈으로 사람을 쳐다보아서 힘들었을 것이다.
 때마침 부모님도 나에게 정신과를 권했다. 내가 자주 아픈 것이 TV에서 나온 신체화 장애가 아니냐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나도 정신과에 가야하겠다고 생각했다. 원인 불명의 병들을 치료하는 것들에 지쳐, 그 모든 원인을 정신적 문제로 뭉뚱그려버릴 수 있다면 오히려 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정신과 초진은 잡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마음이 많이 아팠고, 나도 그 중 일부였다. 나는 처음 간 정신과에서 펑펑 울었다. 나에게는 두 개의 진단이 내려졌다. 신체화 장애, 우울 장애. 이제 나는 공식적으로 우울증 환자가 되었다.
 항우울제는 큰 도움이 되었다. 내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항우울제는 마술이라도 부린 것마냥 엄청난 효과를 보여주었다. 나는 마치 약을 복용하고 자신감에 차오른 기분으로 생각했다."남들은 이렇게 살고 있었구나. 이런 기분으로 살면 안 될 일이 없겠구나."
 그렇게 모든 것이 잘될 줄로만 알았다. 내 기분은 좋아지고 내 마음은 안정되고, 시든 잎들에게는 다시 활력이 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준호 앞에는 창창대로가 펼쳐져 있고,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는 지난한 여정의 시작의 불과했다. 나는 그 이후로 미로 같은 내 마음을 풀기 위해 여러 번 병원을 바꿔야 했고, 눈물을 훔칠 날들은 수도 없이 남아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진로도, 미래도 생각할 겨를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준호는 나와 같이 초저녁에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다. 시립대학교 음악관 앞은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었다. 달 모양의 빛나는 구형 불빛들이 빛나고 있었고,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앉아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초저녁만 되면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낮은 경사의 언덕을 따라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런 기분으로 준호에게 농담을 던지며 잔디밭에 앉았다. 근처에서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볼 적에는 아름다워 보이기만 하던 달 모양 장식품은 벌레들로 가득하였다. 빛나는 것 주변에는 벌레들이 있기 마련이니 어쩔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산 옆의 집을 가지고 싶지만 모기는 피하려는 것은 우둔함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조금 신경 썼다. 나이를 먹은 만큼 학교에서 아는 사람들이 많이 적어지기는 했지만, 내가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있는 장면을 들키면 당황스러울 것이긴 했다. 나는 따가운 시선이 와닿는 것을 느끼며 걸어다녔다. 어쩌면 시선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스스로 시선을 창조해내었다.

 사람들은 나와 갑작스레 나타난 그를 보고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마 커플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는 동성이니까. 친구들은 보통 동성끼리 다니니까. 남자와 남자가 다닌다고 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으니까.

 물론 그들이 우리의 주변에 가까이 와서 우리를 지켜보았다면 다르게 생각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저 둘이 쳐다보는 거 봐. 사랑에 빠진 것처럼 쳐다보고 있어."내지는"뭔가 이상한데?"라며 손가락질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대담한 척하며 학교를 돌아다녔고, 잔디밭에 앉아 준호와 수다를 떨었다. 손에는 신경안정을 위한 음료 '쉼'과 새우깡을 든 채였다. 우리는 잔디밭에서 행복했다. 나는 행복을 가장했지만, 준호는 행복했으리라 믿는다.

 강아지와 같이 산책하는 학생이 보였다. 끼리끼리 모여 영어로 대화하는 외국인들도 보였다. 조깅을 하며 학교 주변을 도는 사람들도 보였다. 나는 그들을 동경했다. 그들과 나의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나는 알았다. '정상' 그리고 '비정상'이었다. 우리는 '비'에 속했고, 그들은 무거운 어깨 대신에 산뜻한 저녁바람과 함께 살아가는 듯했다.

 그는 자신감 있게 다니자고 했다. 준호 또한 나와의 스킨십은 절대적으로 피했지만, 우리가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있지 않으면 어떡하냐고 말로는 의지를 표명했다. 나는 그런 준호의 움칫대는 입술을 바라보고는 그저 웃었다.

 나는 거짓말을 태생부터 못했다. 표정이 투명하여 얼굴이 빨개지면 부끄러운 것이 티가 났고, 찌푸려지면 화가 난 것이 티가 났다. 그런데 이렇게 남들 앞에서 '게이'가 된 채로 놀러다니면 나는 얼굴이 미묘하게 빨개지는 것만 같았다.

 "신경쓰지 마." 준호가 나를 슬쩍 보고는 말했다.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 없어."

 "혹시 아는 사람을 마주치면 그냥 아는 형이랑 산책왔다고 하면 돼."

 나는 그의 말에 동의했지만, 마음 깊이 동의하지는 못하였다.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같이 시립대학교 정문에 있는 나의, 그리고 준호의 집으로 돌아가면서, 준호는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아보였다. 아마 내가 너무 타인의 눈치를 보는 것이 거슬려서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슬펐다. 내가 타인의 눈치를 봐서, 내가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이어서, 상황을 만든 게 나여서 모두 서글펐다.

 우리는 집에 돌아가서 싱글 침대 위에 누웠다. 이불빨래를 오랫동안 하지 않아서 이불에서 텁텁한 냄새가 났다. 집에는 각종 잡동사니들이 굴러다니고, 우리의 생활양식이 부딪히며 떨어져나온 파편들이 눈에 보였다. 나는 눈을 감고 준호를 껴안았다. 그러자 준호는 내 등에 팔을 감아주었다.

 나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그 날의 난기류를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그의 품 속에서만 단단히 고정되어 있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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