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이 집을 나선 뒤, 다은과 도현도 각자의 차에 올라 출근길에 나섰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마음에는 무정과의 만남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다은은 도현의 말을 믿으려 했지만, 여전히 불안했고, 도현은 무정의 태도에 어딘가 불편함을 느꼈다.
서점에 도착하니 도현이 먼저 와서 다은을 반기며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은 다은에게 마치 ‘괜찮다’고 위로하는 듯해, 그저 그의 존재만으로도 다은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
오픈 준비가 거의 끝날 무렵, 매니저 승우가 다가와 다은에게 물었다.
“사장님, 독서 토론 관련해서 회의가 필요할 것 같은데, 오늘 가능하실까요?”
“맞다, 요즘 정신이 없었네. 챙겨줘서 고마워, 승우야. 이따가 다 같이 점심 먹으면서 간단히 이야기 나누자. 다른 직원들에게도 전해줘.”
승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고, 다은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오늘도 바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다은은 서점의 책 내음을 깊게 들이마시며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했다.
정신없이 오전 업무를 마치고 점심시간이 되자,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먼저 매니저 승우가 입을 열었다.
“음, 일단 주해란 작가님께 아직 답신이 없죠? 계속 연락이 없으셔서요. 그리고 독서 토론 일정도 논의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올해 안에 열고 싶었으니까요.”
승우의 말에 다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올해 안에 진행하고 싶었지. 모두가 기대하고 있는 것도 알고. 다만 서점이 확장된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서점 홍보에 좀 더 집중해서 내년에는 꼭 할 수 있게 준비하자. 주해란 작가님과도 계속 연락 시도해 볼게.”
“그럼요! 언제 하든 저희는 계속 같이 할 건데, 중요한 건 어떻게 준비하느냐 인 것 같아요!”
막내 서원의 말에 다른 직원들도 모두 동의했고, 다은은 자신을 향한 직원들의 믿음에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회의가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이 찾아왔을 때, 다은은 도현에게서 온 문자를 받았다.
*
다은 씨, 퇴근하고 저녁 같이 하실래요?
*
문자를 읽은 다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답장을 보내려던 순간, 월광책방 사장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다시 웃고, 사랑하며 살아가거라.”
다은은 그 말을 되새기며 도현에게 답장을 보냈다.
*
좋아요. 퇴근하고 집 앞에서 봐요.
*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 뚜렷한 설렘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어 서점을 마감할 시간이 다가오자, 도현은 그녀가 혹여나 기다릴까 마음이 급해져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잠깐의 기다림 후, 다은이 차에서 내리며 인사를 건넸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에요. 오늘 많이 바빴죠? 얼른 밥 먹으러 가요.”
두 사람은 근처 작은 식당에 들어가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다은 씨는 한, 중, 일, 양 중에 어떤 음식이 제일 좋아요? “
“음.. 저는 한식이요. 도현 씨는요?”
“저도 한식이요. 그래서 외국에 여행 다닐 때 너무 힘들었어요.”
두 사람은 처음으로 서로의 일상에 대해 대화하며,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뒤, 음료를 사서 옥탑으로 향했다. 여름밤의 공기가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었다.
“다은 씨, 제가 이 자리에서 가장 좋아하는 별자리 알려줄까요?”
“별자리요? 어디요? “
도현이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여기서 봐야죠. 자, 잘 봐요. 저기 북두칠성 보이죠?”
도현은 손가락으로 별자리를 따라 그리며 말했다.
“와. 신기해요. 그러고 보니까 하늘을 제대로 쳐다본 적이 없네요.”
“음.. 다은 씨가 좋아하는 별자리는 뭐예요? “
“음… ‘오리온자리’ 요. 날씨가 맑은 날 보면 항상 보이거든요.”
다은은 별을 바라보며 말했고, 다은의 반짝이는 눈에 도현은 마음이 설레었다.
그때, 도현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다은 씨, 저에게 다은 씨는.. 언제나 좋은 사람이에요.”
다은은 도현의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그의 진심 어린 음성은 다은의 마음 깊은 곳을 감싸주는 듯했다. 과거의 상처와 무정과의 갈등 속에서도, 자신이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이 위로처럼 다가왔다.
두 사람은 깊은 대화를 나누다가, 도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다은 씨,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아무래도 저는 상관없어요. 그러니 다은 씨 마음이 원한다면, 나한테 말해줄 수 있어요?”
다은은 잠시 고민에 빠져 망설이다가, 하나둘씩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먼저 과거의 상처와 무정과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무정의 특이한 성향과 그로 인해 겪었던 어려움,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그녀의 삶에 미친 영향까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무정이를 보면 여전히 괴로워요. 그 아이가 가끔 무서운데, 제 잘못인 것 같아서 피할 수가 없어요.”
다은의 목소리가 떨리며 말을 이었다.
“많이 충격받으셨죠. 저는 이런 사람이에요. 그래서 도현 씨가 조금은 두려워요. “
도현은 그녀의 말을 이해한 듯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답했다.
“다은 씨.. 많이 힘들었겠네요, 혼자서.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
다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겠지만, 다은 씨의 모든 아픔을 저한테 나눠주었으면 좋겠어요.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어요. 다은 씨의 슬픈 눈을 꼭 웃게 만들어주고 싶다고요.”
도현의 말에 힘이 실려 있었다. 꼭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자신감, 그 자신감은 다은의 백지 페이지 같은 삶에, 희망이라는 글자를 적어주었다.
그날 밤, 별빛 아래에서의 대화는 두 사람에게 단순한 사랑 이상의 감정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다은은 다짐했다. 더 이상 과거에 매달리지 않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