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운 Feb 25. 2024

수상한 대화 기록

세상에, 제정신인가


소소한 기대를 가지고 열어본 카톡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얼굴은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브런치에 연령 제한 기능이 있는지 모르겠다. 일단 결혼 분야의 글이니 미성년자들의 관심 밖일 것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써보자면, 내 기억에는 이랬다. 대화창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연예인들의 노출 사진 같은 게 있었고 더 올라가 보니 ‘버스를 탔는데 앞에 청바지 입은 여자 꼴린다‘는 둥 ’해외여행 중에 여자 두 명이랑 해봤는데 빡셌다‘는 둥 조용하던 단톡방에 밑도 끝도 없이 ‘섹스‘를 외치는 둥 이해할 수 없는 대화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위의 발언들을 남편이 했는가, 친구들이 했는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고 자세히 기억나지도 않는다. 대화는 오고 가는 거라 남편이든 친구들이든 내가 볼 땐 다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어지러운 대화의 향연 속에 정말 알 수 없던 발언은, 남편이 ‘거기 출근부 별로다’라고 한 말이었다. 이 말이 나온 맥락은 대략, 출장 타이 마사지를 해볼까, 그거 불건전 같다 O만 원이 말이 안 된다, 넣는 것만 안 될 듯, 대딸도 맛있을 듯, 이따 불러보자 **(나) 오늘 외박이다, 그럴 거면 새로운 곳 뚫자, 거기 출근부 병신 같더라, 새로 생긴 곳 2개인데 하나는 괜찮더라, 이런 내용이었다.



출근부... 뭔지 대충 알 것도 같았지만 대화 중에 같이 있던 링크였는지 사진이었는지를 불안한 마음으로 눌러봤던 거 같다. 그렇게 내가 확인한 건 성매매 업소에 그날 ‘일’을 하는 사람들 리스트였다. 출근부가 이런 거구나. 알고 싶지 않았던, 평생 알 일이 없었으면 좋았을 정보를 알게 됐다. 이게 진짜 남편이 한 대화인가? 믿을 수 없어서 스크롤을 멈출 수 없었다. 계속해서 더 옛날로 옛날로 올라갔다. 친구들이랑 놀겠다고 외박을 한 날이 있었는데 그날은 업소에 간 게 분명해 보였다. 간 게 분명한 그날 이후 약 1년 만에 들킨 거다. 그리고 간 게 분명한 그날은 첫째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이 막 지난 즈음이었을 거다.



난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과 충격에 한동안 눈물을 흘리며 내 손에 쥔 핸드폰과, 코 골며 (처)자고 있는 남편을 번갈아 봤다. 직장 없이 임신한 상태였던 나에게 외벌이로는 부족하니 돈 벌라는 압박을 꾸준히 했던 남편이었다. 압박에 못 이겨 편의점 아르바이트에 지원해 봤지만 임신 사실을 알리니 거절당했다. 완곡하게 거절하기 위해서 진심 없이 겉으로만 하신 말씀이었을 수도 있지만 편의점 사장님이 오히려 내 몸을 더 걱정해 주시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났었다. 그런데 정작 남편은 그딴 곳에 비싼 돈을 쓰고 있었다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딴 곳에서 구르고 온 사람과 잠자리를 해왔다는 사실도 화가 났다. 나에게 병을 옮기지는 않았을지까지 걱정됐다. 남편은 잠들면 웬만해선 안 깨는 사람이란 걸 알기에 배를 한 대 때려 주었다. 코골이만 멈추고 팔자 좋게 잤다. 새벽 내내 난 고민에 빠졌다. 이걸 언제 어떻게 말할까. 일단 대화창을 캡처해 두기로 했다. 캡처해서 카톡을 통해 내 핸드폰으로 옮기려다가 남편의 PC 카톡에 남을 흔적까지 지우기는 어려울 것 같아 그냥 내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두었다. 이 일에 대해 운을 띄우기 시작하면 이혼으로 마무리 지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마음의 준비가 다 될 때까지 내가 알아챘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다. 다음 날부터 며칠간 나는 암울했다. 남편이 무슨 일이냐 물었지만 그냥 생각할 게 좀 있다 하고 넘겼다. 그 시절 우리는 자주 싸우던 때라 내가 꿍해 있으니 남편도 괜히 기분 나빠했고 우리는 서로 화해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냉랭한 그 몇 주간 남편이 툭하면 트집 잡고 구시렁대고 째려보고 대답도 안 하는 건 불편했지만 스킨십은커녕 스치기도 싫은 마당에 차라리 잘됐다 생각했다.



이렇게 혼자 앓을 게 아니라 누군가와 얘기를 한번 해보고 싶었다. 기혼자에 아이도 있는 사람이 좋을 것 같았다. 나와 남편이 같이 근무했던 직장의 상사가 떠올랐다. 그분은 일도 잘했고 위아래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았다.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소통이 잘 됐고 그 직장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였던 것도 모두 그분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감사한 점도, 배울 점도 많은 분이라 퇴사하고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상담하고 싶은 게 있다고 얘기하고 저녁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예상외로 그분과의 상담은 최악이었다. 처음엔 위로를 해주셨다. 남편 그렇게 안 봤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면서, 얘기를 묵묵히 다 들어주시고 맞장구도 치셨다. 그러다 본인이 다니고 있는 교회의 목사님의 설교를 내게 전했다. 목사님이 그러셨는데 남자가 밖으로 도는 건 여자의 잘못이기도 하다고 했단다. 내 귀를 의심했다. 예전에 교회를 계속 권유하셔서 한 번 따라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뵀던 목사님은 남자분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내가 고민을 털어놓은 이 직장 상사분은 여자분이다. 공감 능력이 좋으신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심지어 여성분에게 ‘내 잘못’이라는 말을 들을 줄 몰랐다.



의미 없는 상담을 마치고 돌아와 집 앞 놀이터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때 당시 아이는 돌이 지났고 나와 남편은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친정 부모님은 마침 일을 쉬고 계시던 때라 주중에 첫째를 돌봐주실 수 있었다. 아이가 없으니 마음 놓고 오랫동안 집에 안 들어가고 있었다. 그냥 이대로 아침까지 들어가기 싫은 마음이었다. 놀이터에서 서성이다 앉았다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서 남편과 이야기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전 01화 어느 날, 남편의 휴대폰을 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