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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운 Feb 25. 2024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정말이었네


할 얘기가 있으니까 여기 앉아봐 봐.



불안감을 조성하는 대사로 남편을 불러 앉혀 놓고 본격적으로 내가 본 것에 대해 말을 꺼냈다. 남편은 빠르게 인정했다. 본인이 그런 말을 한 것도 그런 곳에 간 것도 맞다고 했다. 그리고 남편은 앞으로 자기 핸드폰을 보지 말라고 했다.



사과를 할 줄 알았다. 혼자 고민하던 지난 며칠간 내가 할 말과 남편이 할 것 같은 말들을 예상해 보았지만 이런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앞으로 핸드폰을 보지 말라니, 이런 식이면 함께하는 ‘앞날’이 있을까? 속으로 생각했다. 그땐 어이가 없어서 제대로 말을 못 했던 거 같다.



어쩌다 대화 방향이 틀어졌는지 모르겠지만 남편은 그동안 본인이 가지고 있었던 불만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많은 얘기를 했지만 확실하게 기억나는 건 평소 집안일을 자기만 하는 것 같다는 불만이었다. 난 집안일을 티 내면서 하지 않았다. 그냥 해야 될 일을 하는 거, 그뿐이었다. 왜인지 나보다 더 화를 내고 있는 남편에게 당신이 한 번도 닦지 않았던 곳, 손대지 않았던 일들을 소개해주었더니 그게 필요한 일이었는지, 내가 하고 있었는지, 몰랐다고 물러섰다. 그동안 나는 각자 눈에 잘 띄는(거슬리는) 부분이 다르니 각자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공동체가 되어 가는 걸 느끼고 만족하고 있었다. 물론 기본적인 청소, 빨래, 설거지도 하고 있었다. 이런 집안일은 숨 쉬듯 당연한 일이라 말하고 보니 웃기지만, 남편은 벼랑 끝에서 나를 공격할 거리가 뭐라도 필요했던 것 같다.



다음 공격 카드는 배려였다. 또 ‘본인만’ 배려하는 것 같다는 궤변을 시전 했다. 엄격하진 않았어도 나름 통금시간이 있는 생활을 해온 남편은 결혼 하자마자 생긴 자유를 만끽했다. 젊겠다, 안정적인 직장도 생겼겠다, 차도 생겼겠다, 집 근처에 친구들도 많겠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밖으로 나돌았다. 원래부터 집순이였던 나는 임신까지 한 상태라 따라 나가지 않고 항상 집을 지키고 있었다. 임신, 출산, 육아 밖에 없는 신혼이었지만 남편이 어디 간다, 누구 만난다는 말도 없이 현관에서 갑자기 나간다는 말만 남기고 쌩 가버려도 봐줬다. 이건 배려가 아닌가? 그렇게 나가서 친구들과 성매매 업소나 갔다는 걸 알고서도, 앞으로 그 친구들 안 만났으면 좋겠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이건 배려가 아닌가? 다행히 이번엔 속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어이없는 와중에 남편의 불만에 하나하나 반박해 주었고 남편은 한 발씩 물러났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으니 그제야 남편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뒤늦은 사과였지만 받아주기로 했다. 비단 결혼 후에만 간 게 아닐 거라는 걸 알지만 그땐 용서했다. 시간이 지나면 잊힐 거라, 용서될 거라 생각했는데 사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용서가 안 된다. 그날 이후 핸드폰은 서로 말을 하고 보기로 약속했다. 이제는 그런 곳에 가지 않을 거라고 믿어보려 했지만 의심이 완벽히 사라지지 않았다. 친구들이랑 밥을 먹고 나면 담배 한 대 피우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일이라고 했다. 누군가 아무 생각 없이 ‘한 발?’을 외치고 누군가 아무 생각 없이 ‘콜’을 외치면 상황 봐서 가는 거랬다. 신생아를 두고도 ‘안 들키면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갈 정도라면 술김에 실수라고 가도 안 이상하겠다 싶었다. 설령 술에 취해 홧김에 진짜로 갔다면 핸드폰에 그 기록이 남았을 리 만무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더 있을까. 1년쯤 지나고 핸드폰을 한번 보자고 했을 땐 흔쾌히 보여줬다. 2년쯤 지나고 보자고 했을 땐 아직도 의심하냐며 그러는 넌 얼마나 당당한지 보자고 내 핸드폰을 달라고 했다. 3년쯤 지났을 땐 평생 미안할 일이라며 기꺼이 보여줬다. 4년쯤 지났을 땐 언짢은 표정이었지만 군말 없이 보여줬다. 이때가 가장 최근에 본 거였는데 나에게 말하지 않고 친구들을 만난 적이 있는 걸 발견하고 남편에게 확인차 물어보니 그럼 안되냐며 화를 냈다.



일 년에 한 번씩 지금까지 4번 정도 핸드폰을 본 것 같다. 지금도 친구들과 놀겠다고 나가면 기분이 나빠지고, 싸울 때마다 이때 일이 생각나서 더 화가 나고, 은근한 분위기를 풍기며 스킨십을 하려 할 때도 가끔 생각나서 피하게 되고, 꼴 보기 싫은 남편 때문에 시부모님에게 잘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고, 아이들에게도 나의 부정적인 감정이 전해질 것 같아 불안하고, 이럴 바엔 그냥 이혼할까 수도 없이 생각하지만, 아직은 애들이 어리니까, 곱게 양육권 넘겨받고 이혼하기도 어려울 것 같으니까, 이런저런 이유로 ‘아직은’, ‘조금만 더’를 되뇌며 참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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