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난 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별 감각이 없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엄마에게 혼이 나는데 엄마가 이런 말을 했다.
"넌 여자니까 남자보다 더 야무지게 잘해야 되는 거야!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뭐 때문에 혼난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여하튼 이 말을 듣고 처음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불리한 존재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후로도 엄마는 종종 [여자로 살아남는 인생 꿀팁]을 며느리도 모르게 나에게만 전수해주었는데
이를테면
"결혼하지 마라"
"전업주부는 남편에게 생활비를 받아써야 하는 굴욕을 겪어야한다."
"여자도 무조건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어야 치욕을 면할 수 있다."
"여자니까 특별히 더 잘해야 사회에서 살아남는다"
같은 것들이었다.
프로이트는 여성들이 남근이 없어 고통받고 있다고 말했다.
정말 맷돌이 시베리아 벌판을 어이없게 굴러가는 말이다.
갑자기 신이 나타나 "고통받는 딸아. 내가 너에게 고추 하나 달아주마" 하면
감사다고 예쁜 걸로 하나 달아달라고 할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말을 바꿔서 "남성들이 누리는 상징적인 우월함을 너에게 주겠노라" 하면
... 적어도 나는 사양하기 힘들 것 같다.
나는 남성이 아님으로 인해 부족한 무언가를 따라잡기 위해 참 많이도 노력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것들을 성취했다.
진짜 남자인 내 남동생이 부러워할 정도로.
<눈물 나는 나의 노력들>
1. 남자들이 잘하는 이과 가서 남자보다 공부 더 잘하기 (적성검사는 문과로 나왔지만)
2. 털털한 성격 인척 거침없이 행동하기 (사실은 쭈구리지만)
3. 건들거리면서 걷기 (비위가 약해서 가래 뱉기는 아쉽게도 실패!)
4. 말할 때 쓸데없이 욕 많이 섞어하기 ('jola','jonna' 정도가 적당하다)
5. 담배피기 (쿨럭 쿨럭..)
6. 숏커트하기 (안 어울려서 실패!)
7. 남자보다 돈 많이 벌기(분하게도 이것마저 실패!)
등등!
부모의 무의식은 자식에게 대물림된다고 한다.
여성으로서 존중받지 못한 엄마의 상처가 무의식에 남아 자식에게 대물림되는 것이다.
게다가 남성적인 것을 동경하면서도 미워하게 된다.
적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앞설 것도 뒤쳐질 것도 없이 자신만의 색깔을 펼치며 다양하게 살아가는 곳이다.
누군가가 가는 길이 옳다고 무작정 따라가거나,
또는 그건 틀렸다며 정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되면
결국 그 사람은 엉뚱한 곳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고유한 길을 갈 때 행복하다.
사실 엄마도 나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었다는 것을 안다.
우리 엄마는 공부를 잘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교육을 원하는 만큼 받지 못하셨다.
홀로 자취하며 일해서 번 돈은 고스란히 남동생들 학비에 보태고
출산을 이유로 직장을 그만둬야 했던 아픔도 있었다.
물론 그 아이가 나다.
불행했던 엄마는 내겐 그 아픔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행복해지는 방법이 아니었다.
엄마가 행복한 여자가 돼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에게 행복을 가르쳐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엄마에겐 세상이 전쟁터였기에 싸우는 기술을 전수해 주었던 것뿐이다.
나는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나만의 고유한 길을 찾아가기로 했다.
여성적인 것 남성적인 것을 모두 떠나
아이처럼 하나하나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면서
내가 궁금한 것, 나에게 편안한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보기로 했다.
나는 마흔 살이지만 이제 한살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좋다.
나는 행복한 여자가 되어 내 아이에게 말이 아닌 마음으로 행복해지는 법을 가르치고 싶다.
세상은 이렇게나 아름답다고..
여자로 태어난 것이 이렇게 축복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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