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브런치북
밉지 않은 나
24화
거절 스킬 레벨 : LV 0
초보거절러의 거절 연습기
by
이지은
May 31. 2021
아래로
"싫어." 까지는 아니어도
"미안한데 안 되겠다."라는 말도 못 하겠는 사람
아이가 아파 간호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다음날 약속을 취소하지 못하는 사람.
결국 무리하게 강행하다가 애한테도 친구한테도 점수 더 깎이는 사람.
나 스스로도 이런 내가 싫은 사람.
그런 사람이 나였다.
거절은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거절 한번 할 때면
피치 못할 사정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나의
몸 둘 바를
모르는 미안함을 최대한 어필하고
상대방의 용서의 제스처를 확인해야만..
아니 확인했음에도!
'이제 쟤는 내가 싫을 거야..'라는 마음으로
며칠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
기왕이면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나는 웬만한 부탁은 다 들어주고 살았다.
종종 무리한 부탁이 들어와도 일단 수락하고 봤다.
그러고는 집에 와서 욕을 했다
"너무 이기적인 거 아냐?!"
그렇게 참고 참다가
더 이상 못 참겠는 어느 날
갑자기
지금까지 쌓아온 관계 전부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끝장을 봤다.
100층 석탑을 영혼까지 끌어모아 쌓아 놓고는
제 발로 뻥 차 허물어 버리는 격이었다.
(이럴 거면 설렁설렁 10층만 쌓을걸!)
거절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데
난
외톨이가 될까 봐 너무 두려웠다.
그나마 몇 안 남은 관계조차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유일하게 안전하게 느껴지는 건 아이뿐이었는데
그것조
차 전적으로 아이 덕이었다.
물론 나는 아이와의 관계에서도 비슷했다.
물을 떠달라고 하면 떠줬다.
얼음도 넣어달라 하면 넣어줬다.
그런데 빨대까지 가져다 달라고 하면 분노했다.
"작작해 이것아!!!!!"
그런데도 아이는 나를 떠나지 않았다.
대신 며칠 스스로 물을 떠먹는 척하다가
다시 또 물을 떠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착한척하다가 폭발하기를 수십.. 아니 수백 번쯤 하다가
어느 날 내 생에 처음으로 금기의 단어를 내뱉었다.
"ㅅ.. 싫어!"
모르는 영단어 처음으로 소리 내어 발음할 때처럼
입안에 낯선 느낌이 맴돌았다.
'
나 지금 '싫어'라고 말한 거니?'
물론 아이는 울음을 빵 터뜨리기는 했지만
적어도 나는
폭발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의 거절 연습은 그날부터 시작된 것 같다.
아이를 상대로 말이다.
가끔은 예전 버릇이 나오기도 하고
과도하게 경직된 자세로 거절해서
마무리가 좋지 않을 때가 많았지만
차츰 나도 나이스 하게 거절하는 법을 배우게 됐다.
거절 스킬도 레벨업이 되는 것을 아는가?
거절 스킬이 올라가면
거절하며 애교 부리기
천연덕스럽게 배 째기
상대방의 거절도 흔쾌히 수용하기가 가능해진다.
거절하니 떠나는 인연도 있었지만
새롭게 생기는 편안한 인연도 있었다.
거절하는 맛을 알고 나니
예전의 고단했던 예스맨으로 돌아가기 어려워졌다.
나를 돌보는 기쁨이 남에게 돌봄 받는 기쁨보다 크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약속을 취소하고 스스로 아픈 몸을 돌보는 기쁨이 아픈 몸을 이끌고 나가 받는 관심보다 더 기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게다가 나는 감기 좀 걸렸다는 이유로 약속을 취소하는 사람들이 정말 얄미웠는데 이제 그런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거절하는 것은 이기적이라는 신념은
나와 남에게 똑같이 힘겨운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었다.
미움받을 두려움과 미워하는 감정에서 허우적대게 된다.
그 밖으로 나오려면 나부터 그 밖으로 나와야 했다.
참고로 내 아이는 거절 스킬 레벨 지존급이다.
말문이 트이고 엄마, 아빠 다음으로 한말이
"안 해"였다.
당연히 거절 연습 상대는 나였다.
얼마나 거절을 잘하는지
그런데도 친구들과 얼마나 잘 지내는지
지켜보고 있자면 신기할 따름이다.
아이는 10년을 연습한 거절
베테랑이니
나는 이제 막 시작한 초보
거절러인 나와는 다를수 밖에!
거절 연습도 조기교육이 필수인가 보다.
이지은의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
written_by_leejieun
keyword
거절
그림에세이
심리
Brunch Book
밉지 않은 나
22
부처인 줄 알았는데 로봇이었어
23
사랑받지 못해 가난하다.
24
거절 스킬 레벨 : LV 0
25
딸 생일을 잊다
26
나는 음식물 쓰레기통이 아니다.
밉지 않은 나
brunch book
전체 목차 보기 (총 29화)
29
댓글
2
댓글
2
댓글 더보기
브런치에 로그인하고 댓글을 입력해보세요!
이지은
가족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푸름이교육연구소
직업
상담사
허들을 넘는 여자들
저자
순전히 노력으로 아이를 사랑할 수 있게된 엄마. 그 우여곡절의 여정에서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된 이야기를 나눕니다.
구독자
498
제안하기
구독
이전 23화
사랑받지 못해 가난하다.
딸 생일을 잊다
다음 2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