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밉지 않은 나
21화
엄마 실격
범계역 2번 출구 흑역사
by
이지은
Jun 3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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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따라 왠지 컨디션이 좋다 했다.
(복선주의)
범계역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락실이며 뽑기 방이며 문구점을 돌며
아이랑 놀아주고 아기자기한 장난감들도 잔뜩 산 날이었다.
그날 하루 쓴 돈이 십만 원은 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아이와 행복하게 보냈으니 괜찮다며 오늘 하루 엄마로 정말 열심히 노력한 나 자신을 조금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복선주의 ×2)
범계역은 젊은이들이 모여 노는 곳이다.
밤이 되면
사람이 많아 지고 네온사인도 화려하게 켜진다.
나와 딸은 그렇게 하루를 하얗게 불태우고는 와글와글한
인파 속에 서
있었다.
하늘은 벌써 깜깜했다.
아이에게 이제 그만 들어가자고 했다.
하지만
아이는 단호하게 싫다고 했다.
일전에 한번 가서 먹어본 이자카야 어묵탕을 먹고 싶다고 했다.
미원이 듬뿍 들어간(듯한) 그 2만 원짜리 어묵탕을 기어이 오늘 먹어야만 한단다.
어르고 달래고 화도 내봤지만 내 딸은 꿈쩍도 안 했다.
사람 많은 범계역 2번 출구 앞에서 아이가 징징대며 울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왜 그렇게 화가 났었는지 모르겠다.
시원하게 가벼워진 지갑 때문이었는지
영혼까지 끌어모아 놀아준 내 노력이 억울해서였는지
양손에 가득 든 아이 장난감이 무거워서였는지...
난 아이손을 거칠게 낚아채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아이는 더 큰소리로 울며
버둥댔다.
그럴수록 내 손에는 더 힘이 들어갔다.
끌고 가는 모양새가 아주 보기 사나웠을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뭘로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아이에게 들인 정성이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손에 들린 장난감 봉투가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내가 그럼 그렇지'
엄마가 나에게 자주 하던 말.
'네가 그럼 그렇지'
꼭지가 돌아버린다는 게 그런 건가 보다.
봉지째 아이 장난감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알록달록 플라스틱 조각들이 산산이 부서졌다.
차마 아이를 때릴 수는 없어 땅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엄마를 어디까지 몰아가야 속이 시원하냐고!!
나한테 왜 이러냐고!!
나도 좀 살자고!!
그렇게 인파 속에서 널브러져 한참을 통곡했다.
인간으로서,
엄마로서,
바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둥그렇게 나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어떤 모르는 여자가 아이를 안아 토닥여주었다.
누군가는 나에게 물 한잔을 먹여주었다.
'아이고 아줌마 뭔 일이에요.'
하면서 말이다.
정말 잘해보려던 날이었는데
정말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는데
박살난 장난감처럼 다 망해버린 날이 됐다.
모여든 사람들은 내가 추스르는 동안 그저 옆에서 함께 있어주었다.
박살난 장난감을 다시 봉투에 담고 일어나자 아이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나는 "엄마 괜찮아?" 하고 물을줄 알았는데
"엄마.... 이제 어묵탕 먹으러 갈 수 있어?"
대단한 녀석.
..
포기를 모르는 녀석이다.
그렇게 결국 2만 원짜리 미원 듬뿍
(인듯한)
어묵탕을 먹으러 갔다
그리고
곧 남편 구조대가 퇴근해 합류했다
.
(구조대는 늘 한발 늦지...)
그 난리를 피고서도 우리 셋은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며 어묵탕을 먹고 있었다.
결국 그날
치킨에 맥주까지 시켜
맛있게
먹었다
.
속으로 '정말 난 제정신은 아니야' 했다.
그날부터 좋은 엄마가 되려는 노력을
조금씩 포기했던 것 같다.
너무 너무 되고 싶었던 [좋은 엄마]
바닥에 납작 나동 그라 보니 내가 도달하려던 곳이 얼마나 까마득하게 높은 곳인지 실감했다.
하루 종일 재미나게 놀아주는 엄마
사달라는 장난감을 기꺼이 다 사주는 엄마
그렇게 놀고도 늦은 밤 술집 어묵탕까지 사주는 엄마
지나가는 누가 봐도 좋은 엄마로 보이는 엄마
워매~ 얼마나 높은지
구름 위로 보이지도 않는다.
바닥에 퍼질러 앉아보니
남보기에 자랑스럽지는 않아도
왠지 모를 가벼움이 느껴졌다.
그래, 지금 나는 이만큼이구나.
육아책 속 성모 마리아 따라하다가
가랑이 다 찢어졌다.
정말 기분 좋고 힘 남아돌 때 한 계단만 올라가자.
방향만 잘 보고 가자.
그래도 엄마인 건 변하지 않으니까
누가 탈락시키는 것도 아니니까.
아이와 나의 사랑은 경주가 아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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밉지 않은 나
19
출산에 자매품 모성애가 없었다.
20
성욕 가출사건
21
엄마 실격
22
부처인 줄 알았는데 로봇이었어
23
사랑받지 못해 가난하다.
밉지 않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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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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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순전히 노력으로 아이를 사랑할 수 있게된 엄마. 그 우여곡절의 여정에서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된 이야기를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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