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밉지 않은 나
16화
담배 피는 며느리
by
이지은
Aug 2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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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허락을 받으러 간 자리에는 각서가 놓여있었다.
지켜야 할 것들 목록이 빼곡하게 쓰여있었는데
이를테면 '서로 존중하며 높여 부를 것', '아이보다 부부가 우선할 것' 같은 내용들이었다.
그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효도할 것'과 '담배를 끊을 것'이었다.
예비 시부모님께서는 결혼을 하려거든 잘 읽어보고 아래에 싸인을 하라셨다.
효도와 금연을 약속해야 결혼할 수 있는 사실이 서글프기도 했지만
그보다 온 동네에 내가 흡연자라는 사실이 소문이 난 것이
더
싫었다.
어떻게 아셨냐하면
어머님께서 남편 컴퓨터의 사진 파일을 보시다가 내가 담배를 피우는 사진을
보신것이다.
호프집에서 찍은 사진이었는데 담배를 물고 눈웃음을 짓고 있는 사진이었다.
게다가 복장은 끈나시에 잔뜩 취해있기까지 했다.
퇴폐미가 폭발!!!
이걸 어쩔 거야!!
젊은 날의 이지은!!
넌 너무나도 자유로운 영혼이었구나.
세상 사람 다 본다 해도 딱 두 사람
시부모님만은 보지 말아야 할 사진이었는데!
(차라리 이 결혼 포기.. 할.. 까?)
여하튼 가까스로
멘탈을 부여잡고 사인을 했다.
살짝 눈물이 날뻔한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날의 울분은 남편이 다 받아내야 했다.
처음 담배를 접한 건 고등학교 때였다. (얼씨구
!
)
동아리 선배가 피는 것을 보고 따라 하던 것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나름 명문고라면 명문고였던 학교를 다니며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답답함 속에서
자유와 일탈의 냄새는 달콤했다.
담배 좀 피우면 뭐 어때?!
맞다.
나에게는 담배 필 자유가 있다.
우리 모두는 담배 필 자유가 있고 그걸 너무너무 인정한다.
너무 인정한 나머지 강남역 근처에서 당당히 길빵을 하며 무언 시위를 하다가 취객에게 봉변까지 당한 게 나다.
(당시에는 길빵 금지 법이 없었고 그때 그 위치에 길빵 하는 남자 무리가
이미 있었음)
헌데 문제는 담배를 끊고 싶을 때조차 멈출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필 자유는 있지만 멈출 자유가 없다.
결혼 후에 어느 날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담배 피지 마! 안그러면 !#$!$#$$#@#!$!!@@!"
(남편보호?를 위해 삐처리함)
헐..
이렇게 까지 싫었나.
간지 난다며?
섹시하다며!!
결혼 후에 슬슬 싫은 티를 내기 시작하던 남편이 어느 날 '안티담밍아웃'을 한 것이다.
연애할 때는 자기 뒤에서 피라며 아저씨들의 따가운 시선을 가려주던 나의 든든한 바람막이었건만!
...
사실은 그때도 쬐~끔 싫었단다.
나에게 잘 보이려면 어쩔 수 없었단다.
욘석 나를 감쪽같이 속였겠다.
처음에는 논리적으로 따지기도 해보고 화도 내봤지만 너무너무 너무 싫어하는 남편을 계속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까짓 거 끊지 뭐..
내 남자가 죽을 만큼 싫다는데..
그래. 담배가 뭐라고..
막상 금연을 실천하려고 하니 내가 담배에 중독되어 있었구나를 뼈저리게 실감했다.
뭔가 몰두해 있을 때나 기분이 좋을 때는 괜찮다가
잠시 짬이나 허전할 때
뭔가 잘 풀리지 않아 힘겨울 때
생각이 많아 심난할 때
담배가 아른아른했다.
심심할 때 놀아주고 등 토닥여주던 친구 같은 존재였나 보다.
담야호~
그만큼 내 삶이 외롭고 팍팍했다는 거겠지..
금연하는데 가장 도움이 된 건 임신을 하려면 건강한 몸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흡연자였던 나는 내가 아무래도 건강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딸은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나를 도운 셈이다.
지지부진하던 금연은 의외로 어떤
'
결의
'
같은 마음을 먹은 후 단칼에 성공했다.
담배는 원래 그렇게 끊는 거라는 말이 적어도 나에게는 맞았다.
담배를 바꿔보고 개수를 줄이는 것은 갈증만 더할 뿐이었다.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운 후에 잠시 다시 담배와의 교제를 재개했었지만 예전 같지가 않았다.
머리도 아프고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이 금세 느껴졌다.
결정적으로 다시 자유로움이 담배에 저당 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헤어졌다.
각서의 '금연하기'는 성공한 셈이다.
의외의 복병 '효도하기'가 아직 문제지만.
다행인 것은 시부모님도 각서의 존재를 잊으신 것 같다는 것.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는 10년도 더 묵은 각서가 무슨 상관이랴!
자식은 잘 먹고 잘살아주는 것이 효도지.
암~
각서는 이제 내 맘에서 보내주기로 한다.
잘가라~ 각서야.
다시 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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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히 노력으로 아이를 사랑할 수 있게된 엄마. 그 우여곡절의 여정에서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된 이야기를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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