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나빠요~" 하던 외국인 노동자 개그 캐릭터 말이다. 우리 남편 별명은 블랑카였다. 생긴 게 정말 비슷한데 거기에 JYP 박진영을 40% 정도 섞으면 딱 우리 남편이다.
맞다. 나는 외모를 보는 타입은 아니다.
인정.
블랑카 60% + 박진영 40%
남편과 같이 다니다 보면 초면인데도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대뜸 "어디서 왔어?" 하고 묻는 사람도 있다. 한국사람이라고 하면 믿지를 않는다. 괜찮으니 어디서 왔는지 자꾸 말해보란다. 진짜 한국사람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포기할 기미가 없으면 우리 남편은 결국 나이지리아에서 왔다고 한다. 그러면 그제야 '그럼 그렇지' 하는 눈빛으로 보내준다. 한국말을 하면 깜짝 놀라며 '한국분이시네요' 하기보다는 '한국말 잘하시네요' 할 정도로 외모에서 풍기는 이국적인.. 그런 풍미가 있는 사람이 우리 남편이다.
헌데 이 사람은 희한하게도 거울을 보면서 흐뭇해한다. 나는 거울을 볼 때마다 뾰루지며 살짝 비뚤어진 코며 무너지는 턱 때문에 심난해 죽겠는데 이 사람은 그 얼굴을 하고서도 콧노래를 흥얼거린단 말이지.
우리 같은 거울 보는 거 맞니?
그러고 보면 얼굴만이 아니다. 대학시절에도 시험을 보고 나면 나는 늘 다 틀렸다고 우울해하고 있을 때 자긴 다 맞았다며 싱글 생글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점수가 나와보면 항상 내가 더 높다. 그래도 이 인간은 별 신경도 안 쓴다. 도대체 뭐 믿고 이렇게 천하태평이야?
이를테면 자기 자신에게 콩깍지가 씐 사람. 걸어 다니는 근자감이 우리 남편이다. 어쩌다가 이지경에 이르렀는지 원인규명이 필요하다 생각하던 차에 시댁에서 그 실마리를 찾게 됐다.
연애시절 시댁에 놀러 갔을 때인데 시댁 어르신께서 남편의 어디가 맘에 들었냐고 질문하셨다. 난 드립 본능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만 "잘 생겼잖아요"라고 대답했는데 전혀 뜻밖에도 외모만 중요시하면 안 된다는 분위기로 대화가 흐르는 것이 아닌가?
여러분들? 저 농담한 거예요. 반어법이잖아요.
차마 이렇게 말은 못 하고 "그럼요. 속도 깊은 사람이죠" 하고 넘어갔는데 그 묘한 분위기에서 난 눈치챘다.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뭐에 씌었다는 것을... 제정신인 사람은 나뿐이란 것을.....
남편의 근자감의 뿌리는 일종의 세뇌 효과였다. 시댁에서만큼은 남편은 호가 [미남]이었고 이름은 [영재]였고 어렸을 때부터 [운 좋은 러키 보이]로 통했다. 시댁만 가면 그 분위기에 휩쓸려 제정신을 붙들지 않으면 나까지 세뇌될 판이었다.
이게 다 사실이라면 이런 인간을 누가 이길 수 있을까?
무적이나 다름없지않은가?
저 모든 것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학점, 아이큐, 외모, 연봉, 건강, 주식에서난 수익 등 모든 것이 내가 더 나았던 순간에도 늘 나는 종종거리며 초조해했고 남편은 어디 근사한 미래를 맡겨놓은 사람 마냥 태평하고 여유있었다.
어라? 뭔가를 이뤄야 행복한게 아니었어?
나는 행복하기 위해 나 자신을 그냥 놔둔 구석이 없을 정도로 열나게 개발하고 또 개발했다.
하지만 이 인간처럼 이루지 않아도 그냥 행복해버릴 수 있다면 이런 개꿀이 어디 있는가!
나는 내가 이뤄낸 것들보다 이 인간이 가진 근자감이 어쩌면 살아가는데 더 도움이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시작했다. 종종거리는 나는 곧잘 피로해졌고 포기했지만 태평하던 남편은 더 오래 기다리고 결과를 만들어내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자기가 무적인데 뭐가 무섭겠는가?! 결국 근거없던 자신감이 근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면 내가 남편에게 질투가 날만도 한데 이 사람은 나에게도 자꾸 세뇌를 한다.
예쁘다고.. 당신 정말 재미있다고.. 똑똑하다고.. 글 잘 쓴다고.. 당신 덕 좀 볼 수 있겠다고..
이 녀석이 자꾸 띄워주는 바람에 나도 내가 자꾸 잘난것 같고 예쁜 것 같다.
뭐든 좀 열심히만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도 자꾸 근자감이 전염되고 있다.
유능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유능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래서 내가 나를 유능하게 느끼기에 행복하다.
내 딸에게 외모, 돈, 학벌, 근자감 중에 딱 하나면 물려줄 수 있다면 근자감을 물려주고 싶다. 돈에서 조금 흔들렸지만... 그래도 근자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