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나의 삶의 한 도막은 집안의 2대 독자에게 잠식당해 가라앉았다. 충분히 이해했고 안심시켜 드렸다.
많이 우셨다. 미안해하셨다. 그리고 오빠를 좀 돌아봐 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언제까지인가. 언제까지 이 빌어먹을 남아선호사상은 내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며 우롱할 텐가.
나는 또 언제까지 계속 이놈 밑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빌빌대야 하는 것인가.
나는 친정 덕을 본 기억이 티끌만큼도 없다. 친정이 버티고 있어야 대접받는다고? 차라리 없었더라면 하고 바랐던 적이 더 많았다. 나는 왜 고아이지 않은가를 원망하며 지새운 밤이 더 많았다.
가시내들은 시집가면 내 집 식구 아니다. 그래서 가시내들은 낳아 봐야 소용이 없다. 내 아들이 잘되면 덤으로 떨어지는 그 고물 덕이라도 보는 것들이 가시내들이다. 하등 소용 가치가 없는 것이 딸들이다. 고로 딸들은 자식이 아니다. 이것이 아버지 당신 생각이다. 한 번 더 가슴에 각인시킨 날이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이년을 더 그렇게 오기로 살아야 했다. 그리고 곱씹었던 할아버지 말씀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혼이라는 큰 산을 앞에 둔 이 순간조차 난 딸이기 전에 걸림돌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젠 빌어먹을 조카에게까지 밀리고 채이고 있었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아니 우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3대 독자 아닌가. 2대 독자는 할아버지도 떨게 했는데 장장 3대 독자인 조카는 오죽하겠는가.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더니 아니,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고 나라님은 악을 써 댔는데도 이 귀 멀고 눈멀어 아들만 바라보는 백성은 내겐 아들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딸들은 필요 없다 소리소리 지르며 내쳤다. 나라에서 딸들을 구원하고자 한 이벤트인지 국민을 줄여버리자 벌인 이벤트인지는 모르겠으나 전자든 후자든 이 나라는 실패했다. 그리고 그 실패는 고스란히 지금을 사는 나, 우리 여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제 제 딸의 이혼이 내 새끼 앞날에 걸림돌이라고 여자인 내게 책임을 묻고 있다.
얼척없는 것은 제 속으로 난 딸들은 그렇게 밉고 사람도 아닌데 어찌 손자를 낳아 줄 며느리는 그렇게 귀하고 중한지. 아버지는 천성이 제 핏줄보다 남의 핏줄이 더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 난 남의 핏줄이 섞인 손자보다도 못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딸은 당신에게 핏줄도 자식도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더럽다. 알고 있었음에도 걸림돌이라는 말은 또 한 번 속을 후빈다.
당신에게 내! 새! 끼! 는 언제나 아들뿐이었다.
그해 봄은 정말 따스했다.
날은 따스하고 바람은 선선했다. 바람은 차가움을 벗어던지고 봄 햇살의 따스함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웬일인지 이 봄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봄이 이렇게 아름다운 적이 있었던가….
한 번도 봄이 아름답다 여긴 적이 없었다. 꽃이 피면 피나보다 했다. 꽃놀이에 줄지어 가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저 많은 사람 틈에서 대체 무엇을 보겠다고 저렇게 피곤하게…. 그러나 받아는 들였다.
인간사 한 모습이라고.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도 나는 여전히 봄을 그저 지나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해 봄은 달랐다.
어느 날 밤 들어서던 골목길이 너무 환해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그녁처럼 입을 벌리고 바라보았다. 골목길을 환하게 밝혀주던 백목련은 처연하리만치 아름다웠고 나의 영혼은 슬픔을 보았다. 활짝 피어있는 목련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함께 피어 바라보았다. 가슴이 울어서 숨을 못 쉴 것 같았다.
아, 아름다움이 너무 깊으면 슬프기도 하구나, 이렇게 가슴이 옥죄어 오기도 하는구나.
길가에 피어 늘어지던 개나리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서 한참을 바라만 봤다.
원래 노란색이 이렇게 화사했었나? 이렇게나 고운 색이었나 물었고, 꽃이 지고 난그 자리에 자리 잡은 푸른 잎들은 또 어찌나 생기가 넘치던지 이 봄이 날 죽이고 있구나? 하고 물었다. 화사하게 피어있는 벚꽃길은 맑고 파란 하늘과 맞물려 이 봄을 더없이 아름답게 빛나게 했다. 아파트 여기저기 지천으로 핀 철쭉은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손을 뻗어 쓰다듬어 보게 했다. 개중에 하얀색 철쭉은 너무 싱그럽고 아름답고 예뻐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지금까지 없었던 행동이었다. 얼굴을 들이밀어 향기를 맡아보고 나서야 나의 행동에 나도 놀랐다. 멍하니 철쭉 옆에 앉아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봄 햇살을 받았다. 그해 봄은 그렇게 아름답고 화사했으며 빛났다. 그리고 그 화사한 아름다움은 결국 내 발목을 잡고 난 기어이 잡혀 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