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하늘에 내 민망한 얼굴과 대머리가 된 나를 그려보고 있는데 할아버지 얼굴이 민망한 얼굴 위에 겹쳤다. 새참 가지러 집에 가자신다. 에고 에고 소리가 절로 나온다.
“쉽지 않제? 그러게, 세상일이 쉬운 것이 있다드냐. 거그다 농사일이. 공부만 한다고 책상에만 앉아 있던 책상 잽이가, 몸도 성치 않아 늘 집에만 있는 집순이한티는 더더군다나 쉬운 일이 있겄냐. 울 손녀는 공부만 하제?”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고 그저 나도 이것저것 해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했고
“모든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고 또 그 일에 맞는 사람이 있니라. 무슨 일이든지 해보고 싶어 하는 니 마음이야 이 할애비가 모르는 것 아니다만, 니가 손을 대야 하는 일이 있고 굳이 손을 대지 않아도 되는 일이 있는데 울 손녀는 앞에서부터 뒤에까지 모두 다 해볼라고 하니 걱정이 된 게 할애비 하는 말이제. 너무 앞에 서서 차고 나가지도 말고 너무 뒤에 서서 쳐지지도 말아라. 그저 한발 물러서서 조금은 손해 보는 듯 그렇게 사는 것이 편하니라. 손해야 볼지 모르지만, 마음은 편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여. 알아듣겄어?”
알아 알아 노력해 볼게 할아버지 말도 이해해 보려 노력해 볼게라는 말로 배시시 웃어 보였다. 난 정말 이 시간이 행복하다.
할머닌 새참으로 간단하게 준비해 놓으셨다. 보기에 간단하게지 육수 내고 식히고 국수를 20명분 가까이 삶아야 하고 고명도 준비하시고 바쁘셨을 게다. 단정하게 준비해 놓으신 새참을 경운기에 싣고 할매와 난 뒤에 타 새참들을 잡고 할아버지는 경운기를 운전해 다시 논으로 향하셨다. 평화로운 얼굴로 상할매는 덜덜거리며 멀어지는 나와 두 노인네를 배웅하셨다.
맛있게 새참을 드시고 잠깐의 휴식을 취하시는 내내 이야기의 주제는 단연코 나였다. 인제 해 봤응게 다시는 하겄다 소리 안 할 것이라고. 다시 논으로 향하시는 동네 어르신들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리고 경의의 마음을 담아.
다시 경운기를 몰고 할매를 태우고 할아버지께서는 집으로 향하셨고 나는 좀 전에 뻗었던 그 자리에 남아 구경을 시작했다. 열대여섯 명의 모잽이들이 일렬로 서서 나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가히 아름다웠다. 모두 허리를 굽히고 손을 움직여 모를 심고 아재 한 분이 둘러보고 “어이” 하면 다시 한 발 뒤로 물러서서 같은 동작으로 동시에 허리를 굽힌다. 굽힘과 동시에 손은 어느새 줄의 빨간 꽃에 가서 꽂혔다. 다시 “어이”. 어느 군중이라 부럽다 할 텐가. 저렇게 일사불란하게 약속이나 한 듯이 움직이는 모습이 난 왜 좋을까. 혼자 무언가 작업을 하는 것보다도 저렇게 함께 무엇인가를 해내는 모습이 좋았다. 살짝이 들려 오는 당신들의 수다. 어제 누구네 집서 뭣이 어쨌다는디 궁금해하고 이쪽에선 오늘 요 아재 논 다 끝나겄나를 염려하고 한쪽에선 내일은 누구네 모심을 날인가를 새겨본다. 각자 다른 이야기를 나누는데도 하나로 섞여서 전혀 어색하지 않고 시끄럽지 않고 즐거운 한참인 것이다. 힘들고 고된 농사일일 터인데 내 눈에는 즐거운 노동으로 보였다. 살짝 살아난 기운으로 아짐과 아재한테 다가갔다. 그리고 몸을 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