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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 탐험가 Jun 13. 2022

나의 이란인 친정엄마, 파티마



골드코스트에 온 지 두 달이 넘어갈 때쯤, 나에겐 작은 위기가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외식병에 걸려버렸다는 것이다. 내가 하는 밥은 맛이 없어 먹기 싫고, 외식을 하고 싶지만 외식을 할 수 없어 괴로워하는 병이라고 표현하면 되려나. 코로나 팬데믹 사태 이후 호주의 락다운(Lock down) 기간 동안 ‘밥은 역시 남이 해주는 밥이 최고다’라는 진리를 깨친 나는 식당 영업이 재개되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데... 얼마 후 식당 영업이 10인 이하의 손님을 받는 조건 하에 재개되었고 나는 ‘남이 차린 밥상’을 꿈꾸며 식당가로 뛰쳐나갔다.


조금 이른 저녁인 오후 다섯 시, 아직은 손님 수에 제한이 있기도 하고 너무 이른 시간부터 나선 탓인지 식당가는 텅 비어있었다. 제일 먼저 발견한 바비큐 식당 앞에 도착한 나. 하지만 돈 없는 공주놀이를 하고 있는 중인 나에게 바비큐 가격은 혼자 하는 식사로서는 무척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값비싼 음식 값에 어찌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던 중, 문득 바비큐 식당 옆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페르시안 레스토랑이었다. 페르시안 음식은 무엇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일단 괜히 한 번 기웃 거리며 메뉴를 살피기 시작하였고, 예쁜 종업원 언니가 환한 미소로 나를 응대하였다. 그녀는 불에 구운 고기 요리인 케밥이 주 메뉴인 곳이라며, 페르시안 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다는 나에게 식사를 해볼 것을 적극적으로 권하였다.


결국 친절한 그녀의 환대에 이끌려 식당 안으로 들어선 나. 오후 5시, 저녁 식사를 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인 데에다가 10인 이하 손님만 받을 수 있는 제재 때문인지 식당 안에는 나와 종업원 언니 단 둘 뿐이었다. 넓은 식당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는 나에게, 이란에서 왔다는 종업원 언니는 페르시안 음식은 곧 이란 음식이라며 음식 하나하나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국적을 묻는 이란 언니에게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을 하자, 그녀는 나에게 자신은 한국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하였다. 어렸을 때 한국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를 너무나 좋아해서 한국 남자랑 결혼까지 하고 싶었다며 한국에 대한 호감을 표했다. 한국 드라마 업계에서 일을 하다가 도망치듯 호주로 떠나온 주제에, 이런 얘기를 들을 때엔 내가 그 일을 했던 게 얼마나 반가운지. 한국 드라마를 소재로 시작된 대화는 내가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근 1시간 내내 이어져나갔다.


그녀는 세 살 난 어린 아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히잡을 벗어던지고 호주로의 이민을 결정한 서른 살의 젊은 엄마였다. 호주에서의 완전한 정착을 꿈꾸며 낮에는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일하고, 저녁엔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을 하는 그녀. 보수적인 나라에서 온, 누구보다도 진취적이고 강인한 그녀의 이름은 파티마였다.


나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호주에 , 한국 드라마에 관심이 있다는  외에는 나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파티마. 그러나 나는 그녀와의 대화 속에서 직관적으로  사람은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이라는 알아차릴  있었다.  신기하게도 부족한 영어로 말을 해도  대화 속에서 사람 사이의 화학작용은 발생한다.


식사를 마치고 가게를 떠날 때 나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물어보았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다음번에 한 번 더 보고 싶다면서. 파티마 역시 나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보려던 참이었단다. 그렇게 호주의 식당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 손님과 이란인 종업원은 서로의 번호를 교환했다.


인생 첫 번호 따기에 성공한 나는 파티마를 초콜릿 카페에서 다시 만났다. 따뜻한 초콜릿 한 잔에 편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는 꽤나 많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초콜릿은 좋아하지만 커피는 좋아하지 않는다, 개를 무서워한다 등등의 사소한 호불호부터 시작해서, 너무나 흔한 이름을 가져서 본인의 이름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 등등... 우리는 무언가를 말할 때마다 ‘맞아, 맞아, 나도 같아!’를 외치며 즐거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깜짝 놀랄 만큼의 대단한 공통점도 아니었다. 다만, 서로에 대한 호감이 우리 두 사람의 별거 아닌 공통점에도 우리를 잔뜩 흥분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서로를 연대하게 할 공통점이 없었더라도 ‘서로 달라서 좋다’는 이유로 친해졌을 우리였다.


그 후로 우리는 몹시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내가 파티마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그녀는 매번 맛있는 요리로 나를 대접하였다. 호주에 있는 동안 정말 다양한 페르시안 요리를 경험할 수 있었던 건 모두 그녀 덕분이다. 그리고 그녀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그녀는 마치 딸내미에게 반찬을 챙겨 보내는 친정엄마처럼 나를 빈손으로 집에 돌려보내는 일이 없었다. 파티마의 집을 다녀온 날이면 몇 일간은 밥 걱정을 할 일이 없을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고 우리의 사이는 점점 깊어져 갔다. 파티마의 가족행사에 나는 언제나 당연하다는 듯 참석했고, 그녀의 이란인 친구들 모임에도 '살럼!(안녕하세요)'을 외치며 동행하는 게 익숙해졌다. 그녀는 나를 가족이라고 칭했고, 그녀의 남편 모센과 어린 아들 알살란도 그녀만큼이나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나는 힘든 일이 있으며 가족의 품으로 가듯이 그녀의 집으로 가서는 가정의 편안함 속에서 페르시안 홍차로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렇게 우리는 정말로 가족이 되어가고 있었다.


손주를 보는 할머니의 마음으로 퍼주는 이란식 고봉밥. 한국 못지않다.


모두가 나를 '지'라고 부를 때, 한국식으로 나를 '언니'라고 부르던 그녀가 생각난다. 입이 짧은 걸 알면서도 늘 많이 먹으라며 고봉밥을 퍼주고, 혼자 가는 것이 위험하다며 밤에는 꼭 직접 운전해서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던 따뜻하고 섬세한 사람. 그녀의 소원대로 언젠간 한국에서 그녀를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 그때는 그녀가 나에게 해주었듯 내가 그녀를 꼭 성대하게 대접해주어야지. 그녀가 보여주었던 이란의 정(情)을 한국의 정(情)으로 꼭 되돌려주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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