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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 탐험가 Jun 21. 2022

하마터면 함부로 설렐 뻔했잖아요.



코로나 제재가 한창이지만, 앤디네 민박은 여전히 제법 성황이다. 타 지역의 강력한 제재를 피해 마스크조차 쓰지 않는 골드코스트를 찾는 여행객들 덕분이다. 그리고 코로나로 인해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다며 일주일간 앤디네 민박을 찾은 손님이 있었다. 그는 바로 20대 중반의 젊은 호주 청년 데미안이다. 서핑을 좋아하는 데미안은 재택근무 기간 동안 바다에서 서핑을 즐기기 위해 그의 작은 경차 안에 커다란 서핑 보드를 싣고 골드코스트를 찾았다.


일주일짜리 장기 숙박 손님이 찾아오자 앤디는 스캇과 함께 그의 캠핑 밴을 타고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다. 민박 손님이 찾아올 때면 앤디는 자신의 방을 내어주고 소파에서 잠을 청하곤 하는데, 일주일이라는 기간은 아무래도 소파에서 지내기에는 불편함이 따르기 때문이다. 더불어 앤디가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자 그에 따른 불편함을 호소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민박 손님이랑 단 둘이, 그것도 남자 손님이랑 일주일씩이나 지내야 한다니... 이것은 조선 여자에겐 꽤나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집 시설이나 좋아서 방문이라도 잘 잠기면 모르겠는데 화장실이며 내 방문이며 걸쇠가 다 망가져 있어서 걱정을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이전에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는데 불쑥 스캇이 문을 열여서 ‘I’m here!!!!’라고 다급히 외치며 부랴부랴 열리는 문을 막은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반대로 스캇이 있을 때 내가 문을 연 적도 있고... 이렇듯 용변을 보는 민망한 순간까지 들킬 수 있는 치욕이 도사리고 있는 집에서 어떻게 젊은 남자랑 단둘이 지낼 수 있겠느냔 말이다. 하지만, 그런 나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여행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나는 홀로 남아 집을 지켜야만 했다.


데미안이 우리 집에 찾아온 후 앤디와 스캇이 여행을 떠나기 전 날, 나는 앤디, 스캇과 함께 나눠먹을 비빔밥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전에도 종종 민박 손님들에게 한식을 대접했던 것처럼, 데미안에게도 비빔밥 한 그릇을 나누어주었다. 처음 먹어보는 비빔밥에 설레어하며 고추장도 왕창 넣던 데미안, 그는 내가 대접한 비빔밥에 엄청나게 고마워하며 자신이 설거지를 하겠다 하였다. 나는 그에게 손님인데 무슨 설거지냐며 괜찮다고 하였으나 그는 결국 내가 설거지를 끝낼 때까지 내 옆에서 나를 도왔다.


그날의 비빔밥


그리고 그날 밤, 내일이면 민박 손님과 단 둘이 남아서 집을 지켜야 하는 처지가 된 나를 달래기 위해 앤디가 내 방으로 찾아왔다.


“지, 데미안은 사람이 참 괜찮아 보여.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겁 많고 걱정 많은 나를 안심시키고 싶었던 앤디. 하지만 앤디는 알았을까. 데미안과 저녁 식사를 하면서 그가 참 선한 인상을 지닌 건실한 청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나는 그가 이상한 사람 같아서가 아니라 도리어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서 더더욱 걱정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런 내 마음도 모른 채 다음날 아침, 앤디와 스캇을 실은 캠핑 밴은 어느새 우리 집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앤디가 떠나고 나는 아침 일찍부터 식탁에 앉아 간단한 식사를 하였다. 민박 손님들은 내가 식탁에 있으면 주로 거실에 있는 좌식 테이블로 가서 식사를 한다. 아무래도 잘 모르는 사람끼리 작은 2인용 테이블에 머리를 맞대고 앉아있으면 조금 어색하고 뻘쭘하니까. 그런데, 데미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내 바로 앞에 앉아서 식사를 했다. 눈곱도 안 떼고 잠옷을 입은 채로 밥부터 먹는 내 앞에 앉아서는, 잘 잤냐면서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침부터 빈 집에 낯선 남자와 단 둘이 앉아 아침식사를 하는 게 편할 리가 없는 나인데...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그것은 불쾌한 불편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마냥 싫지 않아서 느껴지는 묘한 불편함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이 묘한 불편함은 궂은 날씨로 인해 더 오래 지속되고 있었다. 데미안은 매일 아침 5-6시면 일어나 바다로 나가서 파도를 체크하곤 했다. 파도의 높이와 결을 보며 서핑을 하기에 적절한 날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는 서퍼스 파라다이스는 이름값 참 못하는, 서핑에 적절한 동네가 아닌 데에다가 날씨까지 좋지 않아서 사실상 그가 서핑을 즐길 수 있는 날은 거의 없었다.


결국 데미안은 일을 마친 오후 즈음이면 거실에 나와서 나와 대화를 나누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우리는 아주 많은 대화를 나누고 꽤나 가까워졌다. 심지어는 우리 집 근처에서 친구들 모임이 있다며 데미안이 나를 그의 친구들 모임에 데려간 날도 있었다. 물론 예상대로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대부분을 거의 알아듣지 못해서 남들이 웃을 때 알아들은 척 따라서 웃다가만 왔지만... 그래도 집 지키는 멍멍이 마냥 혼자 집에 있는 나를 그런 소셜한 모임에 데려가 준 것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 모임 자리에서조차 주인 따라 나온 멍멍이처럼 보였을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친절하고 건강한 사람과 보내는 꽉 찬 일주일 속에서, 내가 느꼈던 묘한 불편함은 어느새 나에게 또 다른 불안함을 낳기 시작하였는데...


‘제발 데미안이 하루라도 빨리 즈그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세요.’


내 동생보다도 어린, 이 친절한 호주 청년이 좋아지기라도 할까 봐, 어느새 나는 진심으로 데미안이 빨리 그의 집으로 돌아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데미안을 만나고 난 후 그가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서 걱정했던 나의 예측이 그대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어서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 앤디가 여행에서 돌아왔다. 여행에서 스캇과 싸우고 혼자 집으로 돌아온 앤디. 그날 밤, 데미안은 스캇 때문에 속이 상한 앤디의 마음을 헤아리며 밤늦게까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민박집 사장님의 연애사까지 같이 들어주고 함께 고민해주는 데미안. 그는 이렇듯 기본적으로 사람을 참 좋아하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앤디가 돌아온 직후 드디어 데미안이 재택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일주일간 나의 플랫 메이트였던 데미안이 떠나는 날이 온 것이다. 남몰래 데미안이 빨리 집으로 돌아갔으면 하고 바랬으나 막상 정말로 그가 집에 간다고 하니 어찌나 아쉽던지, 우리는 번호를 교환하고 훗날을 약속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또 보자면서. 그렇게 나에게 기분 좋은 불편함을 주었던, 나의 한시적 플랫 메이트 데미안은 떠났다.

 

데미안이 떠난 후, 난 다시 예전의 그 평온하고 심심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오묘한 불편함 따위는 없지만 단조로워서 평화로운 그날들로 말이다. 그리고 가끔씩 데미안과 보냈던, 그 불편해서 즐거웠던 일주일을 떠올리곤 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가 지난 어느 날,  나에게 문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데미안이었다. 도대체 무슨 문자일까 하며 메시지를 확인하는 나.

.

.

.


엉성하게 만든 김밥과 여기저기 흩어진 밥알로 엉망진창이 된 부엌 사진과 함께 그는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너의 기술과 법을 나한테 설명해줘야  .”


그것은, 이전에 나에게 만두 레시피를 문의하던 헬마 아줌마와 마찬가지로, 김밥의 매력에 빠진 청년의 순수한 김밥 레시피 문의 문자였다. 그리고 그렇게 ‘앤디네 민박 비공식 한식 전도사’인 나는 몹시 정성스럽게 사진까지 곁들인 영문 레시피를 만들어서 그에게 김밥 말기의 비밀을 전수해주었다고 한다. 데미안 이 자슥. 그 이후로 김밥은 맛있게 해 먹었으려나?


하마터면 나 혼자 또 함부로 설렐 뻔했다.

그가 딱 일주일만 머무르고 떠나서 정말 다행이지 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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