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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 탐험가 Jun 23. 2022

남이랑 사는 건 원래 이런 건가요?



평생을 살면서 가족 외의 사람과 살아 본 적이 없는 나에게 있어서 국적마저 다른 타인과 함께 사는 것은 일종의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방식에 맞춰가며 지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한 친구들이 결혼 직후에 남편과 살기 시작하면서, 음식물 쓰레기를 냉동실에 얼리느냐 상온에 두느냐, 치약을 쓸 때 중간을 짜냐 맨 뒤부터 짜서 쓰냐 등등의 아주 사소한 것들 때문에 다툼을 했던 이야기를 해주곤 했었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까지 신경 쓸 일인가 싶어 신기했는데, 호주에서 완전한 남과 살아본 후에야 그 친구들이 겪은 사소하지만 큰 갈등을 이해했다. 


앤디와 나는 많은 것이 다르지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다툼 없이 잘 지내왔었다. 비건인 앤디와 육식을 즐기는 나의 식성부터 시작해서 음악 취향, 옷 취향 등등 많은 것이 다르지만 우리는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였고 크게 부딪힐 일이 없었다. 그러나 같이 사는 사이이다 보니, 서로 달라서 생기는 갈등은 의외로 큰 부분이 아닌 설거지 따위의 작은 부분에서 발생하였다. 


싱크대에 가득 채운 물에 세제를 풀고 접시를 문지른 후, 흐르는 물에는 눈 깜짝할 만큼만 살짝 헹구는 앤디. 그리고 세제 거품이 묻은 그릇을 흐르는 물에 뽀득뽀득해질 때까지 헹궈내야만 하는 나. 

앤디의 방식이 나의 눈엔 청결해 보이지 못해 불만이고, 앤디의 눈엔 나의 방식이 물 낭비 같아서 불만인 것이다. 급기야 제발 싱크대에 물 좀 받아서 설거지를 하라며 앤디가 살짝 언성을 높인 적이 있을 정도로 그녀는 나의 설거지 방식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반대로 나는 그릇을 사용하기 전에는 항상 접시에 남아있을 세제를 닦아내기 위해 그릇을 한 번 더 물로 헹궈야 하는 번거로움을 얻었고... 정말 사소하지만 이것이 그녀와 나의 좁힐 수 없는 간극이었다.


타인과 한 집에 살면서 겪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각자 ‘니꺼 내꺼’의 영역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서로의 음식을 공유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앤디가 필요하다면 종종 나의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허락하였다. 계란 하나, 빵 한 조각, 양파 한 개까지 치사하게 너의 것과 나의 것을 따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사해지고 싶지 않다’ 던 나도 결국은 보이고 싶지 않은 치졸함을 드러낸 일이 있다. 별 거 아니지만  내가 먹으려 생각했던 것이 그 자리에 없으면 그것이 그렇게 짜증이 나고 화가 났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잔뜩 출출해졌을 때 어제 먹다 남은 빵을 먹을 생각을 하며 냉장고를 열었는데 그것이 없다거나, 볶음밥에 넣으려고 했던 마지막 계란 하나가 밥을 다 볶은 후에 보니 실종된 것. 정말 대수롭지 않은 것들인데 가끔은 이것들이 순간적인 짜증을 유발한다. 배고픈 자는 음식 앞에서 이토록 예민해지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난 잘 참아내고 대신 앤디에게 진지하게 부탁을 했다. 


“앤디, 내 음식을 먹어도 좋아. 하지만 네가 내 음식을 먹을 때 나에게 미리 허락을 구해주겠니...?” 


알겠다고 하던 앤디는 사실 그 약속을 잘 지키지는 못 했다. 그리고 나의 이 ‘치사스러운 분노’가 포도 사건에서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자취생에게 과일은 꽤나 사치스러운 음식이다. 생계를 위한 필수 영양소도 아니거니와 비싸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는 마트에서 커다란 청포도를 딱 한 송이를 사 왔다. 한 송이에 만 원씩이나 하는 것이라 살까 말까 여러 번 고민을 하다가 구매했다. 식사대용도 아닌 것을 한 송이에 만 원씩이나 주고 샀으니 그 얼마나 사치란 말인가. 


나의 호사스러운 과일을 한 번에 해치울 수 없으니 나는 식사를 하고 나면 포도를 몇 알씩 뜯어서 나눠 먹곤 했다. 며칠 후 나는 그간 먹지 않았던 포도를 먹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고, 그만 발견하고 말았다. 뼈대만이 남은 앙상한 나의 포도송이를 말이다. 아마 냉장고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보이던 그 푸르고 탱글한 포도 알의 유혹적인 자태를 앤디가 차마 뿌리치지 못했나 보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긴데, 그때는 그 앙상한 포도에 얼마나 화가 나던지. 정말 최선을 다해 화난 티를 내지 않으려 어금니를 꽉 깨물고 다시 한번 앤디에게 부탁했었다. 제발 내 음식은 허락을 받고 먹으라면서. 이 얘기를 들은 후 앤디는 나에게 조금 멋쩍어하면서 말했다. 한두 알씩 먹는다는 게 그만 꽤 많이 먹어버렸다고. 


이후 고작 포도 몇 알에 화가 났던 나와 멋쩍어하던 앤디의 이야기를 엄마에게 전해주었는데 엄마는 나의 그 이야기가 꽤나 인상 깊으셨나 보다. 훗날 내가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고서 앤디의 집을 방문할 때면, 엄마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영아, 앤디네 집 갈 때 포도 좀 사가. 앤디 포도 좋아하잖아.”

그리고 그렇게 종종 나는 앤디의 집을 방문할 때면 그녀가 좋아하는 과일을 사 가곤 했다.


한국에 온 후 지금은 오롯이 혼자 지내고 있기에 이제는 생활함에 있어서 그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설거지도 물을 콸콸 틀고 내 맘대로 할 수 있고, 음식은 썩어서 못 먹지 않는 한 내가 원할 때 못 먹을 일 따위는 없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가끔 설거지를 할 때면 나에게 잔소리를 하던 앤디 생각이 난다. 설거지 잔소리가 그리울 만큼 내가 그곳을 떠난 지 오래된 것일까. 이유는 잘 모르겠다. 

지난주에 산 이후로 아직 반도 먹지 못한 참외나 하나 깎아 먹으며 앤디에게 안부 문자나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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