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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 탐험가 Jun 11. 2022

일주일에 세 번 무지개가 뜨는 도시,  골드코스트



나는 한 겨울에는 옷을 네다섯 겹씩 껴입고 다닐 정도로 추위를 정말 많이 타는 사람이다. 겨울에 나를 처음 알게 된 사람이, 계절이 지나 얇은 옷을 입는 여름에 나를 다시 만나면 내가 엄청나게 살이 빠진 줄 알 정도로 나는 두툼한 옷 없이는 겨울을 버텨낼 수 없는 사람이다.


이토록 추위에 취약하고 사시사철 수족냉증을 달고 사는 나 같은 냉동 인간에게 있어서 1년 내내 온화한 날씨를 자랑하는 골드코스트는 천국이 아닐 수 없었다.


골드코스트의  여름 기온은 35도를 웃돌지만 습도가 높지 않아 그늘에선 더위를 크게 느낄  없고, 겨울 기온은 20 안팎으로 우리나라의 가을과 비슷하여 날이  선선하다. 한국의 가을은 스치듯 지나가는 탓에 서늘한 가을이 찾아와도 내가 좋아하는 가죽 재킷을 입을 일이 손에 꼽히는데, 골드코스트의 겨울에서는 가죽 재킷을 교복처럼 걸치고 매일같이 해변 산책을 다닐  있었으니 이것이 나에겐 소소하지만 큰 행복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날씨 좋고 공기 좋은 곳에 사는 즐거움은 바로 행운처럼 무지개를 만나는 일이었다. 그것도 몹시 자주! 심지어는 일주일 동안 무려 세 번이나 무지개를 본 적도 있다. 나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엇!! 무지개야!!’라고 외치며 흥분하곤 했었는데, 골드코스트 사람들에겐 무지개를 보는 것이 꽤나 흔한 일이라 그들은 도리어 무지개를 보고 흥분하는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내 생애 삼십몇 년간 본 무지개보다 골드코스트에서의 600일간 본 무지개가 훨씬 더 많을 정도로 골드코스트는 무지개가 꽃처럼 숱하게 피어나는 곳이다.


쌍무지개마저 흔한 골드코스트


내가 호주에 오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무지개는 비가 그친 후 해가 뜬 어느 날, 사무실 창가 너머로 희미하게 뜬 반의 반 토막이 난 무지개였다. 업무 시간 도중에 발견한 그 무지개가 몹시 반가운 나머지 모니터 너머로 보이는 그 작고 옅은 무지개를 사진으로 남기며 기뻐했던 게 생각이 난다. 토막 난 무지개조차도 발견만 한다면 행운을 잡은 듯 즐거워하는 나인데, 심지어는 쌍무지개도 활짝 피어오르는 이 행운이 깃든 지역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사무실 창 밖의 가녀린 무지개


하지만, 걸핏하면 무지개 꽃이 피어나는 이 사랑스러운 지역에도 단점은 있다. 그것은 바로 이곳의 날씨가 1년 내내 온화하기 때문에 집 안 내부의 난방 시스템이 영 부실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실내 기온이 조금만 낮아져도 보일러를 틀어 바로 온 집안에 열기를 채울 수 있지만, 따뜻한 날씨로 인해 실내 난방 시스템을 갖출 필요가 없는 골드코스트에서는 기온이 떨어질 때면 옷장에서 가장 두꺼운 옷을 꺼내 입어야만 한다.


난방 시스템이 없더라도 기껏해야 바깥 기온이 20도 정도인데 실내가 추워봤자 얼마나 춥겠냐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말 큰 오산이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면 20도 안쪽으로 기온이 떨어지는데, 20도 밑에서 하루 종일 집에 있는 것은 흡사 야산에 버려진 폐허에 사는 것과 같다. 살을 에는 듯한 얼얼한 추위는 아니지만, 은은한 추위가 뼛속까지 잔잔하고도 깊숙하게 파고든달까. 추워 죽겠는 건 아닌데 어느덧 오들오들 떨면서 이불속에 꽁꽁 숨어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럴 땐 히터를 사다가 온 피부가 건조함으로 쩍쩍 갈라질 정도로 공기를 덥혀줘야 하는데, 나의 플랫 메이트 앤디는 히터 사용으로 인한 과한 전기세가 부담이 된다며 히터를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따뜻한 낮 시간에는 반팔 티셔츠를 입고 밖에 나가 볕을 쬐고 다녔으나, 저녁에 집에만 돌아오면 미슐랭 타이어같이 빵빵한 패딩을 입고 이불속에 숨어있었다. 손발이 항상 차가운 나를 위해 앤디가 사준 실내용 털부츠를 양발에 장착했음은 물론이다. 특히나 정말 추운 날에는 혼자서 몇십 도짜리 진을 홀짝이며 몸을 덥혀주기도 하였다. 마치 추운 나라에 사는 러시아 사람들이 보드카를 마시며 추위를 달래는 것처럼 말이다.


밤에는 내복 바지, 털양말, 털신, 그리고 몸을 덥혀줄 진이 필요하다  / 일러스트 by 마루주인


이제는 겨울에도 집 안에서 반팔 셔츠를 입을 수 있는 따뜻한 보일러의 나라로 다시 돌아온 나. 대도시의 빌딩 숲에서 미세 먼지가 가득 낀 하늘을 볼 때면 지금쯤 겨울이 찾아왔을 골드코스트가 그리워진다. 반팔 셔츠에 가죽재킷을 걸치고 해변을 걷다가 문득 하늘을 일곱 빛깔로 물들이는 무지개를 발견하던 그날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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