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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 탐험가 Jun 08. 2022

비건 커플과 사는 육식주의자



내가 스캇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상의를 입지 않은 반나체 상태였다. 바짝 말라 갈비뼈가 보이는 그의 긴 머리는 곱창 밴드로 질끈 묶여있고 목에는 돌고래 꼬리 모양을 형상화한 목걸이가 매달려 있었다. 반나체의 그는 나를 보자마자 아주 익숙하다는 듯이 첫인사로서 나를 꼬옥 안아주었다. 의례적으로 하는 토닥토닥하는 포옹이 아닌, 어릴 적 한국으로 입양 보냈던 여동생을 몇십 년 만에 만난 것 마냥 나를 꽤 긴 시간 동안 안아주었다. 그리곤 나의 Beautiful soul and good vibe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인사법에 익숙하지 않기에, 잠깐 토닥토닥하는 줄 알고 그의 등을 살짝 안고 있던 내 손만이 갈 곳을 잃은 채 허공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듯 외형부터 행동이 모두 소위 말하는 히피 바이브가 넘치는 스캇은 나에겐 만나본 적 없는  특이한 사람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특징적인 점은 그는 몸속에 기생충이 사는 엄격한 비건이라는 사실이었다.


스캇은 유제품류, 생선류도 모두 먹지 않는 가장 극단적 형태의 채식주의자였는데, 음식에 무척 까다로워서 채소도 유기농만을 먹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씻지 않은 유기농 채소를 먹다가 기생충에 감염이 되었고, 구충제나 약 따위를 거부하며 기생충 감염이 자연 치유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가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바짝 마르고, 늘 배가 고프다면서 쉴 새 없이 음식을 먹어대는 게 바로 그 기생충들 때문이었다.


슬림한 그의 몸이 다름 아닌 기생충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무려 2020년대에 기생충 감염에 대한 걱정을 하며 구충제를 사 먹어야 되는지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런 나와는 달리 앤디는 그녀 역시 스캇처럼 비건이 되어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앤디는 우유 한 방울조차도 허용하지 않는 엄격한 비건 식생활에 돌입하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나는 비건 커플 사이에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채식주의자들은 고기 요리 냄새에 예민해서 육식을 하는 사람과의 생활을 불편해하기 때문이다. 호주는 원룸과 같은 형태보다는 방이 여러 개인 큰 집을 구해서 플랫 메이트를 구하는 형태가 훨씬 흔한데, 채식주의자들은 플랫 메이트를 찾는 공고를 낼 때 ‘채식주의자 일 것’이라는 문구를 명시하곤 하기에 나는 앤디의 비건 선언 이후 집에서 고기 요리를 먹는 것이 영 편치 않았다. 눈치를 보는 나에게 앤디는 괜찮다고 편하게 육식을 즐기라고 했으나, 스캇이 내가 고기를 굽는다는 이유로 나와는 주방 용품조차 같이 쓰기 싫어하는 것을 알아버렸으니 내 어찌 편하게 육식을 즐길 수 있었겠는가.


비건 커플에게 고기 냄새 테러 중인 육식 공룡인 나... 고기를 구운 날은 환기를 위해 반드시 문을 열고 밥을 먹어야 한다.


한 번은 급기야는 스팸을 구워 먹다가 스캇에게 크게 혼난 적이 있는데...


“헤이, 지! 너 스팸이 뭘로 만들어졌는지 알고나 먹는 거야?”

“나도 알아. 이거 아주 최악의 고기로 만들어진 거 알고 있어. 하지만 맛있고 간편하잖아.”


저품질의 고기를 다져 만든 햄 따위를 먹는 나는 이후 스캇이 보여주는 동물 사육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며 육식 중단에 대한 교육을 들어야 했다. 충격적인 영상 때문에 실제로 일주일간은 고기 생각이 뚝 끊겼으나, 다큐멘터리의 잔상이 흐려진 후엔 난 다시 육식으로 돌아왔다. 나는 채식주의 같은 건 절대 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후 나는 두 사람이 집을 비울 때에만 부리나케 고기 요리를 해 먹곤 했는데 그때 먹은 삼겹살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깻잎 위에 명이나물과 삼겹살을 둘러 얹고 쌈장까지 듬뿍 바른 그 한 쌈의 맛. 엄마 몰래 불량 식품을 사 먹을 때의 느낌처럼  그날의 그 짜릿한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최악의 고기로 만든 스팸도 맛있는데 잔소리 없이 먹은 삼겹살이 얼마나 맛있었겠는가. 물론 누군가와 같이 먹었으면 더 맛있었겠지만.


사실 내가 서럽고 아쉬운 건 어쩌면 비건 커플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육식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함께 음식을 즐길 수 있는 푸드 메이트를 잃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만드는 한식을 좋아하며 새로운 한식에 언제나 선뜻 도전해 보던 앤디였는데, 비건 선언 이후로 그녀는 내가 끓인 미역국에 소고기가 쬐끔 들어갔다는 이유로 국물에 손도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둔 과자며 아이스크림도 잘도 나눠 먹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턴 앤디는 스캇과 함께 비건용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빼곤 그 좋아하는 아이스크림도 먹지도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한식이 비건도 먹을  있는 음식이라 내가 잡채, 김밥, 비빔밥 등을 만들   같이 한상에 앉아 식사를 나눠 먹을  있었다는 . 그땐 몰랐는데 내가 그렇게 한식을 자꾸 만들어서 밥을 나눠 먹었던  아마도 함께 식사를  사람이 필요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나 싶. 그것이 외로운 육식주의자가 엄격한 비건 커플과 더불어 지낼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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