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에 살아도 또 다른 바닷가로 여행을 가고 싶은 건 참 신기한 일이다. 골드코스트라는 유명 관광지가 어느새 내가 사는 동네가 되어버린 탓에 이 멋진 바닷가마저 그저 집 앞 바다가 되어 버리고, 여행지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여행을 꿈꾸게 된다. 6월, 골드코스트에 겨울이 찾아오기 시작할 즈음, 나와 앤디는 따뜻한 북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조용한 바닷가 마을 에어리 비치가 바로 그곳이다.
에어리 비치는 1시간 남짓 걸으면 동네 한 바퀴를 다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작고 아담한 마을이다. 선착장에서 보트를 타거나 작은 만을 이룬 바닷가에서 헤엄을 치는 것만이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인 평화롭고 조용한 곳이다. 마음 정화의 시간이 필요했던 나와 앤디에게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여행지였다.
에어리 비치 여행이 그 무엇보다 특별했던 이유는 사실 우리가 호텔 같은 일반 숙소가 아닌 보트에서 숙박을 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앤디가 일했던 보트의 선장인 크레이그 아저씨와 앤디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앤디의 방문 소식에 크레이그 아저씨가 흔쾌히 나와 앤디에게 보트의 선실 한 칸을 내주었다. 우리가 지낸 보트는 할리우드 스타들이 선상 파티를 즐길법한 호화로운 보트는 아니지만, 그 작은 공간 안에 없는 게 없는 보트였다. 두 개의 선실, 부엌, 거실, 화장실도 2개나 있는 (대신 폐소 공포증이 있으면 절대 들어갈 수 없는 크기의 화장실이지만) 사실상 집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보트 주인인 크레이그 아저씨에겐 실제로 그 보트가 자신의 거주지이기도 하고.
해본 적 없는 경험에 들떠있었지만, 사실 일주일간 보트에서 지내는 일은 흥미를 자아내는 동시에 불편함 역시 수반한다. 특히 물 사용이 아주 제한적이라 샤워와 설거지 등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 보트 내 물탱크에 한정된 물을 채워놓고 쓰기 때문에 샤워는 불가하고, 설거지를 할 때에도 최소한의 물만을 사용해야 한다. 뽀득뽀득하게 설거지를 하지 않으면 성이 안 차는 나도 이곳에서만큼은 개미 눈물만큼의 물로 설거지를 해야 했다. 게다가 샤워를 위해서는 정박지 근처의 샤워장으로 긴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평소엔 그다지 깔끔하지도 않으면서 또 이런 데에 오면 어찌나 깔끔을 떨고 싶어 지는지, 매일 밤 샤워 도구들을 들고 굳이 그 먼데를 다녀오곤 했다.
이런 불편함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바다 위 보트에서 지내는 것은 역시 그것만의 낭만이 있다. 작긴 해도 있을 건 다 있는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식사를 하고 난 후에는 햇빛이 내리쬐는 갑판 위에 올라가 눕는다. 갑판 위에서 가만히 하늘을 보다 보면 파도 결을 따라 살랑이는 배의 움직임에 나도 모르게 요람에 누운 듯 잠이 솔솔 온다. 그러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일어나면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기도 하고, 그러다 또 너무 더우면 바닷물에 잠깐 발을 담그며 열을 식히기도 한다. 밤이 찾아오면 이러한 평온한 힐링 타임은 정점에 이른다. 잠들기 전 선실 침대에 누워 갑판과 연결되는 창문을 열면 밤하늘의 별빛이 오롯이 나의 두 눈에 담긴다. 맑은 밤하늘 속 총총이는 별을 보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감탄이 터지며 마도로스의 삶을 떠올리게 된다.
아마 이 보트의 주인인 크레이그 아저씨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런 낭만에 빠져서 이 생활을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보트에서 지내는 그들에게 있어서 보트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나 허세와 과시를 위한 물건이 아니다. 그들에게 보트는 집이자 자신의 일부이다. 그래서인지 보트 선장들은 그들의 보트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내가 생활했던 보트의 이름은 ‘Indy'였는데, 인디는 크레이그 아저씨와 함께 한평생을 바다 위에서 보내고 있었다. 아저씨의 색 바랜 가족사진들, 초록색 물이끼가 군데군데 끼어버린 레이밴 선글라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보이는 낡은 소파 쿠션까지, 인디가 아저씨와 지나온 시간의 흔적들을 보트 내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아저씨의 손으로 만들어져 긴 세월을 함께 보내고 있는 만큼, 인디가 고장 나면 아저씨는 직접 양손에 검은 기름때를 묻혀가며 인디를 고친다. 내가 방문했을 때 보트의 일부분이 크게 망가져 있었는데, 아저씨는 마치 아픈 자식의 치료 방법을 묻듯, 이웃 보트 선장들과 티타임을 가지며 인디를 어떻게 수리할지 고심했다.
보트 위에서의 생활이 지금까지 굉장히 인상 깊게 남아있는 건 아마 이런 기억 때문일 것이다. 낭만이 있어서, 해 본 적 없는 경험이라서 좋기도 했지만, 보트 한 척이 마치 생물처럼 인간과 서로를 품어주는 것을 보았으니까. 에어리 비치, 나는 그곳에는 한 사람의 인생이 오롯이 담긴 보트 인디와 그 보트와 함께 인생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크레이그 아저씨의 삶을 보았다. 질리면 재빨리 새로 사고, 망가지면 손쉽게 버리는 시대에 보트 한 척과 인간이 서로의 세월을 공유하며 함께 늙어가는 것이 어찌 특별하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