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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 탐험가 Sep 17. 2022

서른넷의 일식당 막내 알바생 체험기



호주 생활 반 년차, 아르바이트를 구하기로 했다. 매달 정해진 예산 안에서 모아둔 돈을 쓰기만 하다 보니 생활이 살짝 빠듯하기도 하고, 사회생활을 하지 않으니 해외에 살아도 영어를 사용할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아 그에 대한 대안으로 아르바이트를 떠올렸다. 하는 일 없는 백수 상태라 시간이 남아돌기 때문에 적당히 시간을 보낼 일이 필요하기도 했음은 물론이다. 결국 몇 군데 아르바이트 이력서를 넣은 후, 대형 쇼핑몰 안에 있는 푸드 코트의 일식당 종업원으로 일을 시작하였다. 일주일에 한두 번, 하루에 5-6시간 정도만 일하는, 말 그대로 경험 삼아 용돈벌이를 하려는 나에게 딱 맞는 자리였다.


나보다 일곱 살이 어린, 젊은 한국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이 가게는 일본식 덮밥과 라멘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이었다. 테이크아웃 형태의 이 식당에서 나의 주된 업무는 손님의 주문을 받고 미리 조리해둔 음식들을 그릇에 담아 계산을 하는 일이었다. 용돈 벌이도 용돈 벌이지만 나름 영어를 쓸 일을 만들고자 시작한 일이었는데... 하지만 나의 예상과는 달리 가게가 테이크아웃 전문점이다 보니 그 안에서 사용되는 영어는 무척이나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큰 공기와 작은 공기 중 무엇을 선택하시겠어요?’

‘흰밥과 현미밥 중 무엇을 드시겠어요?’

‘메뉴 3가지를 선택해 주세요.’


나는 기껏해야 이 정도의 질문을 앵무새처럼 반복해댔고, 손님들은 그보다도 훨씬 축약된

‘흰 밥 주세요. 그리고 이거, 이거, 이거 주세요.'

라고 대답을 하곤 했다. 영어 듣기 실력이 형편없는 나에게 최적화된 환경이라고 좋아해야 하는 건지 이거 참...


상황이 이렇다 보니 손님에게 밥을 퍼주고 계산을 해주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영업을 시작하기 전 준비 과정과 영업이 끝난 후의 마감 정리가 보통일이 아니었다. 식자재를 씻고, 진열대를 정리하는 일은 기본이고, 마감 후엔 설거지와 바닥 청소, 주방 후드에 낀 기름때까지 닦아야 했다. 아니 처음에 분명 계산원을 구한다고 했었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취업사기인가 싶었지만. 그래도 나름의 책임감을 갖고 일을 해냈다. 매번 퇴근하고 집에 가선 떡실신을 해서는 반나절 내내 몸져누워있긴 했지만.


하지만 불만 한 번 표출하지 않고 시키는 일을 모조리 해내서인지 사장님은 점점 나에게 더 많은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어느 날은 나에게 고구마와 감자를 깎아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던가.

'아니, 내가 주방보조도 아닌데 감자까지 깎아야 해?? 나보다 일곱 살이나 어린놈이 시키는 걸 다 받아줬더니 선을 넘네?'

입 밖으론 찍소리도 못 내면서 속으로는 코리안식 꼰대 마인드가 스멀스멀 치달아 올라오기 시작했지만... 결국 나의 분노에 대해선 티 한 번 내지 못 하고 내 팔뚝만 한 호주 고구마를 군말 않고 깎아댔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참 웃긴 것이 처음엔 감자까지 깎으며 모든 일을 커버하는 게 그렇게 억울했는데, 나중에 일을 관둘 때 즈음에는 오히려 감자 깎는 것이 가장 편하고 좋았다. 자동 버튼이라도 눌린 듯이 같은 말을 주절거리며 손님을 대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 페이스를 조절해가며 고구마와 감자 깎는 것이 속이 편했으니까.

(역시 단순 업무가 최고야...)


6시간 일을 하고 돌아오면 일한 시간만큼 꼬박 침대에 누워 있다가 겨우 일어나서 체력보강한다고 외식을 하던  비효율의 날들, 영어 실력의 향상을 기대했다가 감자 깎는 기술만 늘리며 마무리한 3개월간의 아르바이트 경험.  일을 통해 깨달은 , 역시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 다시는 돼도   체력으로 경험 삼아 뭔가를 해보려는 시도를 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이었다. 30년이 훌쩍 넘게  몸으로 살았으면 이제는 제발  몸뚱이의 적절한 쓰임새와 사용법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것이 서른넷의 일식당 막내 알바생이 깨달은 작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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