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생 탐험가 Oct 12. 2022

낭만 자전거 여행가 제이콥


아직은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골드코스트의 늦겨울. 나는 서늘한 도시의 바람을 피해 후끈한 열대 기후의 케언즈로 여행을 떠났다. 단체 여행이었지만 모두가 각자의 시간을 갖게 된 어느 날, 나는 케언즈의 상징과도 같은 에스플라네드 라군에서 한 독일인 여행자를 만났다. 자신의 두 다리를 연료 삼아 자전거로 호주의 동쪽 해안을 종단 중인 그의 이름은 제이콥. 원래 독일식 발음은 야콥이지만, 그는 자신을 제이콥이라고 불러 달라 했다.


낯선 여행지에서 조우하는 이방인과의 만남은 낯섦에 의한 두려움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그것이 도리어 강한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위험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 이 호기심은 그 사람에 대한 호감으로 자연스레 탈바꿈한다. 이것이 바로 여행이 부리는 묘한 마법이다.


한국에서 몇 년간 일을 하다 지쳐 안식년을 보내러 온 나처럼, 제이콥 역시 독일에서 수학 교사로 일을 하다가 휴식과 여행을 위해 호주에서 지내고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공통점과 사람 좋아 보이는 그의 인상 덕분인지 나는 제이콥에 대한 경계를 풀고 그와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여전히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는 나의 영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내가 꺼내는 모든 화제에 열심히 경청해주는 그의 예의 있는 태도에 나는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내가 왜 호주에서 지내고 있는지에서부터 시작해서는 급기야는 한국의 드라마 시장이 아시아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누었다. 나를 처음 만나는 그에게는 전혀 궁금하지 않을 이야깃거리일 텐데, 그는 중간중간 적절한 질문까지 던져주며 나의 수다에 불씨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활활 타오른 수다의 불은 장장 5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처음 보는 외국인과 낯선 지역에서 제2의 언어로 5시간의 대화를 나눈 것은 나에겐 꽤나 인상 깊은 일이었는데, 제이콥에게도 그것이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는지 그는 굉장히 예의 바르고 조심스럽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이라는 전제 하에 나의 연락처를 받을 수 있는지를 물었다. 남쪽으로 향하는 자신의 자전거 여행 중, 골드코스트를 지나갈 때에 나를 또 한 번 만나고 싶다면서.


또 독일인! 또 여행자! 또 재방문!

독일인 여행자의 재방문 트라우마가 가신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나는 선뜻 나의 연락처를 그에게 알려주었다. 제이콥은 나에게 자전거로 하는 여행이기에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약 한 달 후쯤 골드코스트에 도착할 거라며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떠났다.


그리고 약 한 달 후, 정말로 제이콥이 골드코스트에 돌아왔다. 숙소를 추천해달라는 그에게 나는 앤디의 에어비앤비를 소개해주었고, 그렇게 나는 내가 가장 익숙한 장소에서 그를 다시 마주했다. 나는 다시 만난 제이콥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사실 케언즈에서 집으로 돌아온 이후로 나는 제이콥을 다시 만날 날을 꽤나 기다렸었다. 내가 경계해야 할...‘여행의 판타지 효과'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처음 보는 사람과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즐거운 대화를 나눈 것은 나에겐 정말 특별한 일이라서 나는 그를 한 번 더 만나보고 싶었다.


다시 만난 제이콥과 골드코스트에서 보낸 시간들은 참 건강하고 따뜻했다. 자전거를 타고 조용한 해변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기타를 연주하고, 한식당에 가서 삼겹살에 소주도 한 잔 나누었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낸 듯한 느낌이었달까.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과 보내는, 마음이 채워지는 시간들이었다.


자전거 타던 날.

짧아서 더 인상 깊었을지 모를 3일의 시간이 어느새 훌쩍 지나갔다. 제이콥은 다시 여행길에 오를 채비를 했다. 마지막 날, 그는 나에게 언젠가 독일 혹은 한국에서 또다시 만나자는 기약 없는 인사를 남기며 그의 자전거에 몸을 실었다. 더 오래 알고 지내려야 지낼 수 없는 또 하나의 사람이 이렇게 다시 나를 떠나고 있었다. 특별한 3일을 만들어준 귀중한 인연에 감사하면서도, 이렇듯 빠르게 스쳐 지나가 버리는 인연의 아쉬움에 나는 아주 많이 슬펐다.


제이콥이 골드코스트를 떠난 이후 나는 그에게 가끔 안부를 물었다. 그는 어느새 호주에서의 모든 여행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는 그의 앞날을 진심으로 응원해주었다. 그리고 그 연락을 마지막으로 나는 자연스럽게 제이콥과의 만남을 소중한 추억으로 내 마음속에 남겨두었다.


나의 인생에서 아마도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씩 제이콥을 떠올렸다. 맑고 건강한 에너지가 깃들어있던 사람. 그런 좋은 사람과의 추억은 나를 단단하게 채워준다. 그리고 앞으로 또 이같이 멋진 인연을 만나길 기대케 하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인연에 기꺼이 희망을 품게 한다. 좋은 사람과 보내는 의미 있는 시간은 이토록 큰 힘을 가진다. 그래서 제이콥과 보낸 시간들이 참 고맙다.

이전 27화 축제가 벌어지는 멕시코의 독립기념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