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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 탐험가 Sep 12. 2022

영어와의 사투 2 : 참 말수가 적은 투머치 토커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만을 사용하며 외국에서 지내다 보면 나 자신도 잘 알 수 없는 새로운 자아를 하나 더 갖게 된다. 어려서부터 외국 생활을 하고 두 가지 언어를 자유자재로 쓰는 경우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30대 중반에 타지에 가서 완전히 외국어만을 사용하며 살다 보면, 의도치 않게 나 자신이 지금까지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서 보일 때가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활동적이며 외향적인 아이였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하고 낯선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주로 남자가 대화를 이끈다는 소개팅 등에서도 나는 언제나 어색함을 깨려고 먼저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다 보니 알아서 대화거리를 찾아줘서 참 좋다는 칭찬을 받고는 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나는 꽤나 ‘talkative’한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호주에서 지내면서 나는 ‘너는 참 조용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사실 말수가 적은 게 아니라 말을 못 하니까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인데, 내가 아무리 ‘난 말수도 많고 굉장히 외향적인 사람이야’라고 말해봤자, 그들에게 나는 그저 ‘자신이 말수가 많다고 주장하는 말 외에는 어떤 말도 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였을 뿐이었다. 그나마 '배려 영어'가 통용되는 단 둘만의 대화에서는 이런 소리를 덜 듣지만, 여러 사람이 만나는 자리에서는 나는  어쩔 수 없이 조용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의 새로운 플랫 메이트 안드레아는 가끔씩 나를 그녀의 친구들 모임에 데려가고는 하였다. 안드레아의 친구들은 10년을 넘게 호주에 살아온 다국적 친구들로서 나를 제외한 모두가 영어에 아주 능통했다. 때문에 나는 그들이 신나게 대화를 나눌 때면 그들이 하는 이야기의 큰 흐름만 알아채거나 혹은 반대로 전체 맥락은 모르겠지만 가끔씩 디테일만 알아들어가면서 힘겹게 대화를 쫓아가야만 했다.


영어를 잘 못 할 때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시의적절한 때에 짧고 간결한 말을 치고 빠지는 것인데, 나에겐 그것이 불가능하다 보니 나는 나에게 발언권이 주어질 때를 제외하고는 정말이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남들이 웃을 때 눈치껏 따라 웃거나 조금 알아듣는 표현들이 있을 때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 것 정도가 내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리액션이었다. 대화에 참여하고 싶어도 구체적으로 알아듣지 못하고 뭐라고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서 주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나를 보고 그 친구들은 말했다.


“넌 정말 말수가 없구나, 원래 쑥스러움이 많니?”


앗 절대 아닌데... 살면서 단 한 번도 샤이걸 캐릭터로 살아본 적이 없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람. 그들이 식사 내내 웃고 떠드는 동안 나는 그저 미소를 담당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니, 제 아무리 ‘아니야! 나 엄청 외향적이야’라고 해봤자 그건 정말이지 전혀 근거 없는 주장으로만 비춰질 뿐이었다. 사실 나에게 뭔가 발언권이 주어질 때조차도, 설명하기가 복잡하거나 전문용어가 필요한 주제에 대해서는 말하는 것을 포기하거나 대충 짧게 대답했던 탓에 말수가 없는 샤이걸로 비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성격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말과 행동에 의해 결정지어지는 것이라, 말로써 전하는 나의 표현력이 줄어듦에 따라 결국은 그것이 나의 성격으로서 굳어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조용한 미소지기 정도로 여겨졌던 내가 그 친구들과 함께 노래방에 갔을 때 고성을 지르며 노래를 했으니 그 모습이 그들에겐 얼마나 괴이해 보였을지... 나의 노래에 놀라면서 귀를 막던 한 친구의 모습이 잊히지가 않는다.


아무튼. 전혀 편하지 외국어로 대화를 하는 것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쓰이는지, 안드레아의 친구 모임처럼 영어가 능숙한 사람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오면 나의 뇌는 거의 정지하다시피 하여 언어와 관련한 기능을 하지 않았다. 누가 아무리 뭐라고 떠들어도 나의 뇌는 그것을 '언어' 받아들일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자동으로  모든 것을 '소음'으로 처리해버렸다. 소리는 인식을 해도 그것을 언어로 해석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다른 사람들이  앞에서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도 상당히 관대한 편이었다.


나의 이란인 친구 파티마는 그의 어린 아들에게 말을 하거나 남편에게 빠르게 무언가를 전달해야 할 때 그녀의 모국어를 사용하고는 했다. 나는 정말이지 전혀 개의치 않았는데, 그녀는 다른 언어를 사용할 때마다 굉장히 미안해하며 나에게 양해를 구하곤 했다.


“다른 언어를 사용해서 미안해. 네가 앞에 있을 때는 영어를 써야 하는데...”

“파티마, 난 정말 상관없어. 나의 뇌에게도 쉴 시간이 필요해, 정말 괜찮아.”


서로 국적이 다른 외국인들끼리 동석을 할 때에는 서로 뜻 모를 말을 주고받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정말이지 농담이 아니라 나는 내 욕을 해도 상관없으니 나의 뇌에게 끝없는 영어의 세계로부터 잠시간의 자유를 주고 싶었다. 뇌의 휴식을 호소하며 말 못 하는 바보처럼 지내는 것이 유독 답답해지는 날이면, 나는 종종 나의 방에서 한국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몇 시간이고 쉴 새 없이 통화를 하곤 했다. 영어로 했으면 1시간은 족히 걸렸을 내용들을 20분 내로 빠르게 두다다다- 말하면서.


일전에 나의 친구 앤디가 ‘언젠가 네가 영어를 유창하게 사용하게 되어서, 내가 너의 진짜 성격과 말투를 오롯이 알게 될 날이 오면 좋겠다’라고 했었는데, 앤디에겐 미안하게 됐다. 아마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조용한 미소지기’라는 나의 제2의 캐릭터는 계속해서 유지될 것 같다. 요즘엔 서브 캐릭터가 유행하는 시대이니까... 앞으로도 나는 계속 그렇게 지킬 앤 하이드처럼 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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