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첫 아이의 1학년 첫가을 운동회다. 학교에서 온 일정표를 보니 어린 시절 내가 해온 운동회와는 조금 달라 보인다. 낮 12시 30분이면 모든 일정이 끝이다. 김밥에 치킨도 없이 오전에 운동만 열심히 하고 맛있는 점심은 각자 알아서 하란다. 워킹맘에겐 도시락 쌀 일 없어 반갑다만 겨우 오전 3시간 동안 과연 얼마나 들고뛸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일정표를 보니 1학년 아이들은 50미터 달리기를 하고 사다리 터널 릴레이 경기 그리고 줄다리기를 하면 모든 행사가 끝이다. 하긴 이제 삐악삐악 1학년인데 너무 많은 경기를 하면 운동회 하다 지쳐 널브러질 수 있으니 삐악삐악 적당히 하는 게 학교 측도 부모 측도 한결 마음은 놓일 일이다.
9시 30분까지 엄마아빠는 학교 운동장으로 와달란 내용을 보고 남편과 설렁설렁 집을 나섰다. 이미 학교 주변은 너무 많은 차들로 진입도 어려울 지경이다. 간 만에 온 동네 즐거운 노랫소리가 퍼지니 할머니 할아버지 동네 분들도 기웃기웃 둘러보신다. 아이들이 귀한 곳이다 보니 한 아이에 부모가 함께 동반해서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더 많이 보인다.
우리 집 첫째 녀석은 아마 1학년 중 몸무게가 제일 많이 나갈 거다. 먹성이 워낙 좋아 해가 지도록 뛰어놀아도 먹는 양이 운동량을 뛰어넘으니 통실통실 살이 오른다. 통실통실 내 아들은 50미터 달리기에서 4명 중 꼴찌를 했는데 아무래도 친구들에 비해 통통한 모양새가 달릴 때마다 저항을 많이 받으니 날렵하게 바람을 가르기엔 불리해 보인다. 달리기엔 재능이 없는 걸로 정리를 해야겠다.
스타트는 좋았으나... 네가 꼴찌구나 ㅋㅋㅋ
두 번째 경기는 사다리터널 릴레이 게임이다. 짝꿍과 함께 출발 한 뒤 동그란 장애물을 한 명씩 통과하고 반환점에선 친구와 함께 손을 꼭 잡고 돌아오면 끝나는 게임이다. 오늘 아들은 청군이었는데 백군보다 시작이 좋아 청군이 월등히 이겨가고 있었다. 나 역시 청군 이겨라 같이 손뼉 치며 응원전에 흥을 올렸다. 거의 마지막 주자가 다가올 때쯤 한 여자아이의 속도가 다른 친구들에 비해 현저히 느렸다. 뛰는 것도 느리더니 원통에선 쉽사리 나오질 못해 결국 담임 선생님이 달려가신다 원통 끝에서 선생님이 손을 내밀자 그제야 아이가 나온다. 선생님은 손을 뻗어 아이를 불러내고 기다리고 있는 친구 손에 여자친구의 손을 잡아준 뒤 함께 결승점까지 달려가신다.
' 저 아이가 혜리구나..'
올해 아들의 첫 상담 때 담임선생님과의 대화가 생각났다.
담임 선생님은 참 좋은 분이시다. 매일매일 책 한 권을 꼭 읽어주시는, 아이들과 함께 협동미술작품 만들기를 시도해 보고 동일한 모양의 종이접기를 반복적으로 하면서 아이들의 손이 영글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을 즐기는 스위트한 남자다. 그 분과 첫 상담이 떠오른다.
" 이 책상이 재현이 자리입니다. 여기에 앉아서 이야길 나누실까요?"
책상 네 개가 한 분임이다. 네 명의 아이가 한 그룹으로 함께 앉아 배우고 있었다.
책상 위 같은 모양의 작은 종이 박스 세 개가 나란히 있다.
" 어머니 이 세 개의 종이박스 예쁘죠? 재현이가 만든 건데 처음엔 조금 엉성했지만 두 번째는 조금 더 나아졌고 마지막엔 확실히 반듯하니 예쁜 상자가 완성됐어요. 재현인 남자아이치곤 종이접기를 깔끔하게 잘하는 편이죠."
아.. 이런 깊은 뜻이 있었구나.. 아이들 손가락이 영글어 가는 모습을 이런 식으로 보고 싶으셨구나.
4명의 아이들 책상 위 비슷한 듯 조금씩 차이나는 박스들을 살펴봤다. 한 아이의 책상 위 종이 박스가 아무리 봐도 다른 친구들에 비해 조금 엉성하다.
" 선생님 그런데 이 책상 위 종이박스는 조금 덜 예쁜데요?"
" 아.. 그 친구는 조금 도움이 필요한 아이예요.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느립니다. .엄마가 외국분이셔서 그런 이유도 있고.."
말을 아끼신다. 아들에게 가끔 듣던 혜리라는 아이인가 보다. 반 친구 중에 말을 하지 않는 친구가 한 명 있단 얘길 했었다. 왜 말을 안 하는지 어떤 이유인진 이제 1학년인 아들이 알 리가 없으니 그저 말을 안 하는 친구가 한 명 있다 전할 뿐이었다.
선생님이 불쑥 웃으며 말씀하신다.
" 어머니 근데요.. 이 네 친구들이요. 여자아이 둘 남자아이 둘 이렇게 넷이 앉아있어요. 가끔 수업을 하다 뒤를 돌아보면 재현이와 승현이가 혜리를 도와줘요. 만들기를 하든 글을 읽든 가끔 뭔가 도울 일이 있잖아요? 그럼 두 아이가 찾아도 주고 챙겨도 주고 그런 모습을 보면요. 너무 대견하고 예뻐요."
운동회가 거의 끝나갈 무렵 운동장 계단 응원석에 열심히 응원하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같이 응원도 하고 물도 챙기고 다른 학년 경기도 보면서 말이다. 그때 내 옆자리에 어느샌가 혜리가 앉아 있다.
보통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유독 이마가 넓고 조금 튀어나왔다. 그래도 1학년 특유의 귀여운 표정이 있는 예쁜 아이다. 옆에 앉은 유나 엄마와 이런저런 얘길 나누는데 혜리가 나에게 머리를 기댄다. 마치 강아지가 주인에게 자기 머릴 쓰다듬어 달라는 듯 머리를 내 겨드랑이 사이로 비빈다. 순간 깜짝 놀랐지만 작은 아이가 뭔가 기대고 싶은 게 있나 돌아본다.
혜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꼭 안아준다.
" 안녕? 너 이름이 혜리지?"
두 눈만 나를 바라보며 말이 없다.
" 나는 재현이 엄마야. 혜리야 이모가 안아줄까?"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지만 혹여나 추울까 혜리를 다시 안아줬다. 내 아들과는 달리 너무 마른 아이다. 어깨며 팔을 주물러준다. 말 한마디 없이 그저 내 옆에 붙어 앉아 있다. 꼭 딸이 하나 더 생긴 기분이다. 운동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담임선생님을 만났다. 운동회 준비하느라 고생 많으셨다 인사를 나누며 오늘 혜리가 저에게 와서 안아달라 했다 말씀을 전하니 깜짝 놀란 얼굴로 몇 번이고 돼물으신다.
" 혜리가요? 정말 혜리가 그랬다고요?"
엄마가 되고 온 동네 꼬마들의 이모가 되고 오늘은 눈이 예쁜 혜리의 이불 같은 이모가 되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상들과 기억들을 돌아보면 1년간 만나온 많은 아이들의 맑은 눈과 응답들이 나를 성장시켰고 나를 치유하고 있다. 가냘픈 혜리의 어깨가 자꾸 생각난다. 이 예쁜 아이를 나를 위해 그리고 혜리를 위해 다시 꼭 안아주고싶다. 너의 이름은 혜리 나의 이름은 재현이 이모.. 이모가 꼭 너를 학습둥지로 초대할게. 안녕 혜리야. 반가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