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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나 Nov 09. 2024

너와 나 우리의 '학습둥지 프로젝트'(16)

나는야 공무원계의 빌런

7월 첫째 주부터 수업을 해야 한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최대한 빨리 수업을 시작해야 한다. 머릿속에 온통 그 생각뿐이다.

올누림 도서관 개관은 6월 26일.

개관 전 몇 번이나 도서관을 찾아갔다. 시골에 있기엔 너무 훌륭한 시설이다.

전시관 및 아이들을 위한 유아방, 강당, 정보화실, 강의실 심지어 영화관이 없는 시골 마을을 위한 작은 영화관까지 있다. 마치 시골에 금방 귀촌한 서울 사모님 같은 느낌이랄까? 화려하고 멋진데 범접하기 힘든 그래서 나와는 동떨어진 어떤 존재 같다.

4층까지 모든 것이 최신식이다!

도서관 데스크를 몇 번이나 찾아갔다. 7월부터 프로그램실을 사용할 수 있는지, 예약은 어떤 식으로 가능한지 알아봐야 했다. 개관은 했지만 아직 모든 것이 정리되지 않아 산만하다. 담당자들은 자리에 없고 도서 대출을 처리하는 계약직 여사님들만 자리를 지키고 계신다. 이 넓은 공간을 관리하기엔 인원이 너무 적다.

조짐이 좋지 않다. 건물의 규모만 봐선 직원이 스무 명은 있어야 할 듯한데 보이는 직원은 넷이나 될까?  모든 이들이 바빠 보인다. 사내 전화로 몇 차례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결이 쉽지 않고 연결이 돼도 너무 바쁜 상황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런 와중에 나까지 무언가를 부탁하려니 면목없고 어렵게 느껴진다.

이 조직의 생리를 알기에 이 멋진 공간을 오픈하고 운영하기 위해 지금 도서관 직원들은 자신을 갈아 넣고 있을 것이다. 내 속이야 타지만 아마 그 들은 몸이 타고 있을 것이다.

정리되지 않는 곳에서 수도 없는 항의와 건의사항은 상상만으로도 진이 빠진다. 몇 번의 접촉 끝에 어렵사리 통화가 됐다. 시스템이 불안하니 우선 7월 첫째 주 수업은 수기로 예약을 처리할 테니 프로그램실에서 시작해 보란 답변이 돌아왔다. 대신에 시스템이 정상화되면 직접 도서관 사이트에 접속한 뒤 예약일자와 시간 인원 등을 등록하는 예약제로 운영하니 차질 없이 이용해 달라 요청한다.

어떤 식으로든 강의실만 구할 수 있다면 그 정도의 수고로움은 감당할 수 있다.

7월 첫 째 주 수업은 올누림 도서관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공지를 단톡방에 남겼다.





새로운 공간에서 모든 것이 제대로 정비된 것은 아니지만 첫 수업을 시작했다. 새로운 교실은 아주 깨끗했고 고성능 전자칠판이 갖춰져 있었다. 강의자료를 연동시키면 아이들은 직접 화면에 그림을 그리거나 답변을 써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고가의 기구를 망칠 수 있으니 가급적 시청각 자료로만 이용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사실 이렇게 다시 교실을 구해 쾌적한 환경에서 수업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와 아이들은 충분히 만족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2회 차 강의 때 벌어진다.

2회 차 수업을 하던 날 강의실에 전자칠판이 없었다. 전자칠판이 도서관 자체에 두 대 밖에 없는데 하나는 미술 전시관으로 이동해 있었고 다른 하나는 가족센터에서 이용하는 전용 칠판이었다. 사실 이런 관계를 제대로 알 턱이 없는 우리로선 예약을 했으면 공부를 할 수 있는 수단이 있어야 하는데 화이트보드 하나 없이 강의실만 덩그러니 있으니 수업 자체가 불가능했다. 부랴부랴 도서관으로 달려가니 전자칠판은 미리 요청하지 않으면 이동이 쉽지 않고 화이트보드는 따로 준비해 둔 것이 없단 답변이다.

2시간 동안 아이들의 난리통이 불 보듯 뻔하니 수업을 접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난감함을 느끼던 찰나 신규직원 분이 가족센터에 요청해 전자칠판을 빌려왔다. 감사하다 인사를 드리고 그날 수업은 그렇게 마쳤다. 수업자체도 산만해 조금 짧게 진행하고 아이들을 돌려보냈다.

다음 날 아침부터 전화가 울렸다. 차석급 도서관 담당자다.


"주사님 도서관에서 전자칠판을 이용하실 거면 최소 이틀 전에 미리 연락을 넣어달라 제가 문자를 드리지 않았나요? 가족센터에서도 전자칠판을 갑자기 빌려가서 항의를 하고 그리고 저녁 7시에 이미 가족센터도 모두 퇴근한 시간에 부탁을 하셔서 도서관 측과 가족센터 측이 서로 불편했습니다."


"아, 여러모로 죄송합니다. 제가 기억을 못 했나 보네요. 예약할 때 전자칠판이 필요하면 미리 따로 연락을 드릴게요."


아침부터 이런 전화를 받고 나니 나 역시 몹시 기분이 언짢았다. 내가 큰 잘못을 한 건가? 이용하면 안 될 걸 이용한 것일까? 아이들이 수업을 듣는 걸 알 텐데 칠판 하나 없이 덩그러니 책상과 의자만 있는 것이 정상은 아니지 않은가? 도서관에 민폐만 끼치는 사람이 된 기분이다.

직원이 보낸 문자를 뒤져본다. 전자칠판 이용 시 미리 연락을 달란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문자 내용을 정확히 짚어가며 내가 항의할 수 있을까? 난 이미 이 바닥에서 기피 대상 1 호인게 아닐까?

가끔 인사와 대화를 나누던 몇몇의 직원은 이제 연락하기 껄끄러워졌다. 서로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래서 가끔 슬플 때도 있다. 사람과 아이들이 좋아 시작한 일인데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와 부담을 주고 있을는지 생각이 들 때면 가슴이 답답하다.


나는야 공무원계의 빌런이다!





며칠간 생각을 정리하고 또 정리해 봤다.

문제는 전자칠판이다. 아무리 좋은 강의실이 있다한들 칠판이 없으면 아이들은 배울 수가 없다.

1층 전시실로 내려간 도서관용 전자칠판을 안정적으로 사용하기 어렵다면 가족센터에 있는 전자칠판을 어떻게든 이용해야 한다.

가족센터와 도서관이 대립하게 된 것도 우리 클래스가 전자칠판을 이용했기 때문이니 이 문제는 정확히 내가 나서서 풀어야 했다.


가족센터에 찾아가 읍소하자.

전자칠판을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빌려준 순 없는지

이렇게 좋은 시설을 아이들을 위해 제대로 활용해 줄 다른 방법은 없는지

차라리 가족센터가 우리 아이들을 품어줄 순 없는지

협상을 하든 논의를 하든 아님 가서 소리라도 지르고 와야겠다.


7월 중순의 어느 날.

오전 연가를 내고 가족센터로 달려갔다.

물러설 수 없다면 부딪히자.

설득에 실패하더라도 결론은 빠를수록 좋다. 그래야 대안도 빨리 찾을 수 있으니.


그렇게 가족센터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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