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밤 속_붉은 점

18번째

by 김현진


양철로 만들어진 우체통은 세월의 흔적을 가리지 못한 채 붉은 피부가 벗겨져 곳곳이 녹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메일, 핸드폰 메시지, 그리고 카톡 때문에 우체통은 이제 관광지에서나 볼 수 있는 물건인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날 밤에도, 둘 다 취해 있었지만 이런 곳에 우체통이 있다며 신기하다며 희정이와 이야기를 했던 게 기억이 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최신형 흰색 소나타가 눈발을 뚫고 우리 앞에 멈춰 섰던 것도.

희정이는 문을 열고 차량에 탔고 나는 잘 들어가라며 소리치고는 뒷문을 닫았다.

그렇게 내가 본 희정이의 마지막 모습은 우체통보다 더 빨갛게 볼이 끓어오른 채, 술에 취해 눈이 감길 듯 말 듯한 귀여운 모습이었다.

다시 한번 머릿속에 기억을 펼쳐 놓고 하나씩 되돌아봤지만, 답답하게도 단서로 쓸 만한 차량의 번호나 택시기사의 얼굴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기사의 얼굴이나 차량번호는 굳이 외우려고 하지 않았고, 당연히 내 핸드폰 속에 저장됐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틀렸다.

아니 내가 틀린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나를 발판으로 삼아 자신은 용의자에서 빠져나가고, 나를 대신 집어넣어서 범인으로 의심 받게할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뒤를 밟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은 계획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이 그룹에 다시 속하는 것부터 계획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모든 친구들을 무작정 의심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나뿐만 아니라 서로가 의심을 시작할 것이고, 악랄한 범인은 더욱더 철저하게 자신을 감추면서 나를 사지로 몰아넣을 거니까.


그렇게 망상에 잠겨 멍하니 우체통을 바라보고 있으니,

주변의 행인들이 나를 보며 한마디씩 하는 게 느껴진다.

다들 내가 이러는 이유를 알지도 못하면서 우체통을 부시려고 하는 정신병자를 보는 듯한다.

아무렴 뭐 어때, 나도 내가 맛이 간 건 잘 알 고 있으니 상관없다.

그러니 이렇게 계속 서있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편의점이든 카페이든 들어가서 마실 것과 함께 약을 먹고 생각을 정리해야겠다.

눈앞에 간판 등에 이제 막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 편의점이 보였다.

혹시 모를 CCTV를 찾기 위해 편의점으로 향하기 전에 주변의 골목들을 다시 한바퀴 돌았다.

하지만 건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길이 좁아서 차를 대놓고 있을 만한 곳도 없어서 눈보라가 치던 밤에 누군가 나와 희정이를 지켜봤을 만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뇌에서는 이미 과부하가 온 듯, 오른손과 오른발 끝이 저릿하기 시작했다.

왼쪽 무릎에도 염좌가 생겨 손을 대면 뜨거울 정도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몸과 마음 그 어느 하나도 멀쩡하지 못한 내 자신이 너무 불쌍했지만 길거리에 나앉아 울 시간은 없다.

길을 다시 돌아 우체통이 있는 길 반대편에 위치한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편의점 안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커플을 지나쳐 냉장 음료 칸으로 향했다.

커플들이 한 쌍의 아메바처럼 붙었다 떨어졌다 할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소란스러워 커플을 곁눈질로 째려보았다. 그들이 꽤나 오랫동안 시끄럽게 굴었는지 점원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은 채로 그들이 빨리 사라지길 바라는 눈치였다.

‘뭐 저녁시간이 지나서 이제 한잔하러 가거나 아니면 더 뜨거운 데이트를 할 시간이겠지’ 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1+1아메리카노 하나와 참치 김밥 한 줄을 사서 점원에게 계산을 요청했다.

점원은 꽤나 피곤했는 지, 하품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다가 내가 계산을 해달라고 하자 황급히 하품을 멈추고 바코드를 순식간에 찍고 카드를 앞쪽에 넣어 달라고 했다.

카드를 꺼내서 앞쪽에 넣는 동안 점원이 아직 대학생인지 전공 교재를 꺼내 놓고 공부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이내 안쓰러운 마음이 생겼다.


계산이 끝나자 나는 아메리카노 한잔을 따로 점원에게 건넸다.

“저도 이렇게 아르바이트 하면서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많이 피곤해 보이네요. 이거라도 한 잔 하세요. 어차피 한 잔만 마실 건데 1+1이라 집어 온 거라서요.”

그는 꾸벅하고는 아메리카노를 받아 빨대를 꽂았다.

내가 어디에 전자레인지가 있느냐고 묻자, 냉동코너 옆에 있다고 알려주고는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달라고 하며 뒤이어 시끄러운 커플들의 계산을 했다.

나는 참치 김밥을 데워 놓고는 계산대 근처에 테이블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밖을 바라보았다.

전자레인지가 자기에게 맡겨 놓은 음식이 이제 따뜻하다고 알려주는 순간 커플들은 편의점을 빠져나갔고 내부는 알바생의 펜이 사각사각대는 소리만 들릴 정도로 다시 고요해졌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난 이후로 처음 맞는 고요함이 오히려 어색해서 김밥을 꺼내고는 괜히 아르바이트생에게 말을 걸었다.

“기말고사는 끝났을 것 같은데, 계절학기라 공부하고 있어요?”

“아니요, 그냥 평소에 공부를 안 하면 제가 못 따라가더라고요. 공대생이라 틈날 때 공부 안 하면 못 따라가겠어요. 근데 어제는 야간 근무자가 펑크내서 대타 뛰니까 더 피곤하네요.”


어젯밤?

나는 자리에서 뛰쳐나와 카운터 위에 양손을 탁 내리며 그에게 물었다.

“혹시 몇 시부터 몇 시까지 근무했는데요?”

그는 나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당황했지만 나에게 받은 커피를 쓱 보더니 질문에 대답했다.

“10시부터 오늘 새벽 6시까지요, 집이 근처라서 끝나고 한숨자고 원래 근무시간인 오후 근무에 지금 출근했어요, 커피 덕분에 그래도 오후 근무 끝날 때 까지는 버틸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그는 무언가 보았을 지도 모른다.

빨간 우체통이 노을 빛에 기대어 긴 그림자를 만들어 편의점의 통유리 창을 넘어올정도니까.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나는 지난 밤에 나와 희정이가 탄 택시를 보았냐고 물었다.

“아니요, 눈이 너무 와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어요. 어제 밤이면 눈이 휘몰아치듯이 와서 집에 어떻게 갈까 계속 걱정만 했거든요. 손님도 거의 없었고요. 근데 뭐 중요한 일이라도 있으세요? 물건이라도 놔두고 내렸는데 차번호를 까먹으셨어요 아저씨?”


나는 헛된 희망이 바스라지는 것을 숨기고자 겸연쩍게 웃고는 갑자기 너무 뜬금없는 질문을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물건을 잊어버렸는데 차 번호를 기억하지 못했다고 둘러댔다.

“지갑이라도 잃어 버리셨나보네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한국에서 도둑질한 카드 쓰는 멍청한 놈들은 없을 거니까요, 아저씨”

그는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 말을 이어갔다.

“아! 맞다, 그 날 하루 종일 눈이 내려서 손님이 거의 없었는데 특히 밤에는 오는 사람은 진짜 없었거든요, 그런데 아저씨가 말한 시간에 담배를 사러 온 사람이 있었어요, 아마... 한시 20분쯤인가 그랬던 것 같은데, 뭐 그분이 보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도 도와드릴 방법이 없네요.. 제가 혹시라도 그분이 다시 돌아오면 말씀 드릴께요.”

“고마워요, 혹시라도 나타나면 나한테 꼭 알려줘요, 저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라서 도와주면 제가 따로 사례 할께요.”

아르바이트 생은 두 눈을 감고 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로 돌아와 김밥을 우적우적 씹었다.


다시 생각해보자.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은 누군가는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 혼자서는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혼자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니 미칠 것 같은 느낌이 나를 엄습해왔다.

여기서 정신줄을 놓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는 주머니속에서 처방 받은 안정제를 입에 털어넣고는 아메리카노를 벌컥 들이켰다.

약효가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약 때문에 갑자기 쓰러지지 않을 거라는 안도감이 나를 가득 채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핸드폰 게임은 설탕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