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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진 Sep 01. 2021

하얀 밤 속_붉은 점

26번째


이곳으로 따로 수사인원을 보낸 적도 없기에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이민형의 손등을 얼어붙은 냉동 닭껍질처럼 만들기에 충분했다.

벨소리는 계속해서 울려 대며 텅 빈 복도를 채웠지만 이민형의 핸드폰의 송신음이 자동응답 메세지로 넘어갈 때까지 울림은 계속됐다.


이민형은 심장이 거꾸로 돌아 몸이 차가운 피로 가득 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신을 더 날카롭게 세워야 한다.

문 뒤에는 누가 있을지 알 수 없다.

이민주가 나에게 덤비려고 날카로운 것이든 뭉툭한 것이든 가리지 않고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오히려 위험에 처한 상태로 정희정의 집에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

후자라면, 범인이 이 벽너머에 있을지도 모르니 문을 열어보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문을 바로 열어 젖히지 않았다.

조금이나마 의심을 줄이고자 복도를 빠져나와 엘리베이터를 누르고 내려간 척했지만,

내려가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곳 근처에 숨어 누군가 나오는지 기다렸다.


10분이 흘렀지만 안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문밖으로 나서는 사람 또한 없었다.

서로가 숨을 죽이며 숨어 있는 시간은 끝이 났다는 것을 이민형은 알았다.  

더 이상 미룰 수 없기에 가슴에 얼어붙은 쇳덩이가 내려 앉은 사람처럼 냉정하게 행동하기로 이민형은 마음먹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1시간동안 연락이 없으면 서에서 지원을 받아 1606호로 자신을 찾으러 오라고 소림 형사에게 문자를 남기고는 1606호의 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마치 처음 온 것 마냥 문을 똑똑 노크하며 물었다.

“안에 누구 계십니까? 영등포에서 나온 이민형 형사라고 합니다. 잠깐 여쭤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고요할 것만 같았던 문 안쪽에서는 여자의 울음소리가 문틈 밑으로 기어나와 자신을 살려 달라고 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는 손대면 빠삭하며 깨질 것만 같이 깡깡 얼어 있는 문고리를 잡고 힘차게 돌렸다.

기름을 먹지 못한 문은 끼이이이익 소리를 냈다.

굶주림에 울부짖는 아이처럼 리는 기괴한 소리는 이민형의 귓등을 후 갈겼다.


문이 열렸다.


이민형의 시선은 현관 가운데에 놓여있던 신발부터 거실을 지나 베란다로 향했다.

그의 오랜 경험상 문 뒤 아니면 문을 열자마자 달려드는 사람이 있을 수 있기에 그는 먼저 문을 살며시 밀어 놓고 기다림과 동시에 범인이 달려들어 그를 뜯어 물으려고 해도 회피할 수 있게 자세를 낮추고똑바로 정면을 바라봤다.

문이 끝까지 밀려나 덜컹 소리가 나며 벽을 치는 순간 그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베란다 끝에 칼을 들고 서있는 이민주와 뒤돌아 앉아있는 덩치 큰 박호준의 모습이었다.

정희정의 집에서 왜 이들이 이렇게 앉아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당장 이민형이 할 수 있는 것은 멈추라고 소리치는 것밖에는 없었다.


“멈춰!!!”


둘을 향해 소리쳤지만 이민주는 여전히 칼을 내려놓지 않고 언제라도 뛰어내릴 듯이 배란다 뒤를 힐끔 힐끔 곁눈질했다.

박호준은 그런 그녀를 보고 아무런 말도 그리고 어떠한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만이 현재의 상황파악을 위해 긴박하게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공포에 질려 20미터 높이에서 뛰어내리려고 하지만 겁에 질려있는 이민주와,

더 이상 삶에 미련이 없어 숨 쉬는 것조차 귀찮아져 버린 것처럼 보이는 박호준의 모습이 이민형의 두 눈에 박혔다.

그의 눈과 머릿속에서 두개의 혼란스러운 모습이 하나로 오버랩된 순간,

이민형은 박호준이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정희정 그리고 박호준까지 목숨을 잃은 마당에 이민주까지 잘못된 선택을 하게 둘 수는 없었기에,

이민형은 이민주에게 아까 보다 한층 진정된 톤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민주씨 맞으시죠? 저는 이민형 형사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계속 친구분들과 정희정씨의 죽음에 대해서 소림 형사와 조사하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도와드리겠으니 일단 진정하시고 칼은 내려 놓으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민주는 그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칼을 내려 놓지 않고 계속해서 그를 경계했다.

이민형은 왼팔은 들어 올리고 오른팔로 안주머니를 뒤져서 자신의 신분증이 있는 지갑을 꺼냈다.

지갑을 들어올려 그녀에게 보여주었지만 너무 멀어서 안보이는 듯 이민주가 눈을 찌푸리자

지갑을 꺼낸 손으로 아리랑 볼을 던지듯이 그녀의 앞으로 신분증을 던졌다.

눈앞에 떨어진 이민형의 신분증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연골이 사라진 사람처럼 다리가 풀리며 주저앉았다.이민주가 여전히 칼을 손에 쥐고 있었기에 이민형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그녀를 진정시키고자 다시 말을 걸었다.


“칼은 멀리 두셔도 됩니다.  그래야만 제가 지금 이 상황에서 이민주씨를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못 미더우실 수 있으니 지금 제가 제 동료인 소림형사와 112에 전화해서 다른 팀을 출동시켜 이민주씨를 돕겠습니다.  지금 이민주씨도 위험에 처한 것처럼 보이니 제가 도와드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세요.”


그는 말을 마치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112에 먼저 전화를 걸어 주소를 말하고 살인 사건이 발생한 것 같으니 당장 출동해달라고 말하며 자신의 신분을 다시 한번 밝혔다.

베란다에서 세차게 불어오는 겨울 바람 때문에 손과 칼이 붙어버린 듯한 이민주도 서서히 그를 겨누는 팔을 내렸다. 그녀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이민형은 소림 형사에게 전화를 걸고는 스피커폰으로 현재 상황을 공유했다.


“소림 형사, 지금 박호준씨의 집으로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바로 돌아와서 정희정씨의 집으로 와.. 주소는 아까 내가 보낸 메세지를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안 그래도 문자 보고는 바로 돌아가고 있어요 선배님, 무슨 일이에요?”

“박호준씨는 정희정씨의 집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이고 여기에 이민주씨도 갇혀 있던 것처럼 보이니 얼른 와. 이민주씨가 상당히 힘들어보여. 이미 서에는연락해서 다른 팀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으니 따로 연락하지 않아도 돼.”


이민형 형사는 소림 형사와의 대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끄고는 말없이 서서 지원을 기다렸다.

10분정도 지나자 소림 형사가 먼저 나타났고 얼마지나지 않아 지원팀이 나타났다.

도착한 모두가 이민주를 둘러싸고 나서야 그녀는 칼을 멀찌감치 밀어내며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내가 정말 죽이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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