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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진 Sep 12. 2021

하얀 밤 속_붉은 점

30번째


까만 밤하늘의 어둠으로 덮여 있던 아파트 위로 노랗고 붉은 사이렌의 색깔이 덧칠 되고 있었다. 

죽은 희정이와 호준이 그리고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정이는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을 제외한 모두가 사건이 일어난 아파트 밖에 모여 불어오는 바람을 몸으로 버티며 우뚝 서있었다.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며 다른 사람들에게 상황을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는 성운이에게 나는 살며시 다가가 섰다.  가까이서 친구들을 보니, 나를 제외하고는 일찌감치 자리에 있었는 듯 다들 귓볼이 빨갛게 멍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성운이는 눈인사를 하고는 계속해서 친구들에게 사건에 대해 브리핑을 했다. 다른 친구들은 말없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인사를 대신했다. 


태휘는 성운이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있었지만 툭치면 무너질 것 같은 모래성처럼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계속해서 서로의 상황을 메세지로 주고받았지만, 실제로 사건현장을 확인하는 것은 고통스러운일일테니까. 나는 기절까지 했지만 성운이 앞에서 후들후들거리며 서있는 태휘를 보며 오히려 그 녀석이 대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재영이와 총재는 성운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총재는 왼팔에는 패드를 옆에 끼고 오른손으로는 일할 때 쓰는 안경을 치켜 올리며 침착하게 말을 이어 나가고 있었지만, 재영이는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총재의 가정에 겨우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해주는 정도였다. 

그렇게 모두가 정신을 놓고 아비규환에 빠져 있는 동안, 성운이가 나지막하게 내뱉은 한 마디는 이미 지옥에 있는 우리들의 숨통을 다시 한번 끊어 놓기에 충분했다.


“민주는... 아무래도 경찰에 조사를 받으러 간 것 같아... 그것도 호준이의 죽음과 연관된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말이야..”

모두가 혀가 잘린 좀비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체 '어........ ' 소리만을 쉬이익 거리며 내뱉을 뿐이었다. 

그래도 모두가 정신을 차리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성운이의 핸드폰이 그때 다시 울리기 시작했기에 다들 바람 빠진 풍선에서 세어 나오는 소리를 멈추고는 그 벨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런 모습이 너무나 부담스러웠는지, 성운이는 모두를 둘러보고는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며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떨어지기 위해 뛰어갔다. 남아 있는 무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림 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 있을지 긴장하며 우리는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출발탄을 쏘아 올린 것은 태휘였다. 


“이건 말이 안돼, 희정이가 죽은 것도 난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 그런데 지금 호준이마저 죽었다고? 그것도 민주가 호준이를 죽이고, 어쩌면 희정이마저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격분하는 태휘를 진정시키려는 목적으로 총재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내가 듣기에는 총재가 태휘의 감정을 폭발시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진정해 한태휘!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네 추측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아. 너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건 우리가 모두 민주를 의심하는 것처럼 들리잖아?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건 없어 다만 민주가 그 현장에 있었다는 것 자체가 조사해 볼만한 상황이니까...” 

총재가 차마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태휘의 주먹이 총재의 오른쪽 턱을 강타했고, 덕분에 총재의 테블릿이 산산조각 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너는 희정이가 죽어서 좋지? 아니 어쩌면 지금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거냐?”

나와 재영이는 총재가 희정이가 죽어서 좋냐는 말 뜻은 이해했지만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느냐는 그의 말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태휘가 손을 털며 우리가 몰랐던 뒷이야기를 시작했다. 


“너희들 희정이하고 총재 사이가 왜 그렇게 좋지 않은 지 생각해본 적 없어? 

나는 어느 순간 의심이 들더라. 물론 내가 희정이한테 콩깍지가 씌워져 있는건 다들 잘 알고 있으니 그렇게 희정이가 성격이 좀 유별나도 나는 희정이 편을 들어주고 싶었어. 

희정이가 그래도 자기 실수를 어느정도는 인정하는 편이거든.

그래서 희정이가 총재의 자존심을 아주 제대로 긁어서 스크래치 낸 일에 대해서도 분명 진심 어린 사과를 우리가 모르게 했을 거라고 생각 했어, 그리고 그걸 받아주지 않을 만큼 총재가 속이 좁지 않다는 것도 우리 모두가 너무 잘 알고 있지.”


“그만!!!” 

총재가 아파트가 떠나갈 듯이 소리쳤다. 

그가 소리친 ‘그만’이 아파트 주변을 한바퀴 돌고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가시밭길 위에 서있는 듯 쭈뼜쭈뼜 서있었다.

“내가 말하게 해줘, 괜한 의심은 사고 싶지도 않고 나도 아직 너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한태휘.” 

그의 말에 태휘는 알겠다고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총재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증오가 서린 목소리로 첫마디를 뗐다. 

“나는 희정이를 좋아했어. 그것도 그년의 실체를 알기 전에 그냥 겉만 보고서였지. 

아마 뭐 우리 중에 희정이에게 호감을 가지지 않은 남자가 있었을까? 

아무도 없었겠지 나같은 컴돌이도 눈이 훽 돌아가게 만들 정도로 희정이는 매력적이니까.” 


총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얀 피부에 얇지만 길게 뻗은 눈썹 그리고 작지만 가득차서 넘실대는 눈빛.

희정이의 눈웃음 한방이면 구미호에게 홀린 듯 남자들은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총재마저 희정이를 좋아했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다소 충격으로 다가온 듯 태휘를 제외하고는 놀랍다는 눈으로 총재를 처다봤다. 


“희정이는 항상 남들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친절하고 살갑게 타인을 대했지. 

그게 친구든 아니면 지나가는 버스기사 아저씨든 말이야. 

어느 날 내가 혼자 휴게실에 앉아서 열심히 모니터와 싸우며 코딩을 하고 있을 때 희정이가 옆에 오며 음료수를 하나 건내면서 말을 걸었어.

에어컨도 절전한답시고 후덥지근하게 틀어 놓았는데, 희정이가 다가오는 순간 그 공기조차 싱그럽게 바뀌더라. 그때 알았어 내가 희정이를 좋아한다는 걸.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희정이에 대한 마음을 키워 나가고 있었지만, 

희정이가 먼저 눈치 채고는 나에게 이야기 했어 혹시 자기를 좋아하고 있냐고. 

하지만 나는 차마 사실을 말할 자신이 없었어. 

사실을 말하면 거절당할 것 같았거든 그렇게 되면 다시는 희정이를 볼 수 없을 거란 걸 알고 있으니 당연히 거짓말을 했어.  그 말을 듣고는 희정이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가득 했어.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마치 왜 자기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냐는 듯한 표정이었던 것 같아. 

그 자신만만한 정희정에게 내가 빠꾸아닌 빠꾸를 제대로 먹였던 거지, 근데 그게 문제였을까? 

사사건건 내 행동과 말에 대해서 트집을 잡기 시작하더군, 너네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동아리방에서 혼자 작업하고 있으면 음료수를 주던 호의는 커녕 왜 일을 여기서 맨날 하냐며 핍박을 주지를 않나, 맨날 컴퓨터만 붙잡고 있으니 건강이 안 좋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살살 신경을 긁었지만 그때는 바보처럼 나를 걱정해주는 구나라고 생각 했었지. 

하지만 그날 나와 한태위, 윤재영 그리고 정희정 넷이서 함께 서로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나의 노력과 자존심을 바닥으로 밀어내는 말을 하더군 그것도 너네가 다 보는 앞에서 말이야. 

그 때부터 나는 그년이 꼴도 보기 싫었어. 그리고 그런 여자한테 혹한 내가 병신같이 느껴지더라.” 


총재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입력하는 것 처럼 자신의 과거를 공유했다.

그리고는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터미네이터처럼 딱딱하게 고개를 돌리며 태휘에게 말했다. 

“아! 그렇다고 내가 죽이지는 않았어. 그런데 누가 죽였는지는 몰라도 죽여줘서 기뻐.” 

총재의 표정에는 얇은 미소가 담겨 있었다. 

물론 그 얼굴도 날아오는 태휘의 주먹에 다시 뭉게졌지만 총재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성운이는 더이상 태휘가 주먹을 휘두를 수 없게 그를 꽉잡고 있었고, 

나는 총재가 한 대 더 얻어 맞기 전에 자리를 뜨라고 총재의 손을 잡고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가까이서 본 총재의 얼굴은 성하지 않았다. 

태휘의 주먹이 맨질 맨질한 재질은 아니었는지 이마가 살짝 찢어져 피가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미안하다 나 때문에 일이 더 복잡해지는 것 같아서...” 총재는 감정을 되찾은 것처럼 말했다. 

나는 아무 말없이 한 손으로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까지 굳이 한 거야? 

그러면 나뿐만 아니라 너도 유력한 용의자로 올라갈지도 모르는데, 대체 왜?” 

내 물음이 재밌다는 듯 총재가 웃으며 말했다. 살짝 찢어져 있던 입술은 웃음과 함께 터졌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정희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우리 모두 희정이와 연관되어 있어. 그리고 이 사건과 어떤 의미로 가장 가까워 보였던 호준이가 죽은 것을 보면, 우리 모두 용의 선상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거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희정이가 죽은 지 하루만에 호준이마저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남아 있는 모두가 용의 선상에서 빠져나가 기는 힘들다.형사들은 조만간 우리 모두를 불러내어 어떻게든 단서를 찾으려고 할 것이다.


“너 오기 전에 성운이에게서 너와 성운이가 뭘 하고 다니는 지는 들었어. 소득은 딱히 없었다고 들었지만 말이야. 그런데 조심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희정이도 죽였고, 그리고 호준이마저 혹시 같은 사람이 죽였다면.. 이것 저것 파고 드는 너가 다음 타겟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나는 경찰이 부를 때까지 조용한 곳에 가서 지내고 있을 거야. 나는 죽고 싶지 않거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우리는 길을 따라 쭉 내려와 대로변에 도착했다. 

멀리서 보이는 택시를 잡아 세워 총재를 태웠다. 택시의 문을 닫기 전에 총재는 한마디 덧붙이고는 떠났다. 

“아! 그런데 잘 생각해봐 희정이는 단 한번도 남자를 만난 적이 없어, 적어도 우리가 알기로는 말이야. 그런데 나같은 놈이 한 둘이었을까?” 

그 한 마디에 담긴 총재의 의도는 명확했다.


이 사건은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해 벌어진 치정극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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