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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진 Dec 14. 2021

하얀 밤 속_붉은 점

31번째


경찰서에 들어온 이후로 이민주는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차안에서 몸을 덜덜 떨어가며 단서가 될 수 있는 내용들을 하나씩 내뱉던 그녀가

조사실에서 묵언수행을 계속하는 바람에 두 형사는 상당히 난처해졌다.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왜 갑자기 진술을 거부하는지....” 

이민형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자 이마에 새겨진 주름이 두배로 늘어났다. 

“큰일이네요... 일단은 시간도 늦었고 진술도 거부하고 있으니 오늘은 본인이 원하면 서에서 보호하고, 내일 다시 조사해 보시죠” 소림도 하품을 하며 입을 크게 벌린 채로 말했다. 

이미 시간은 자정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기에 둘은 이민주를 다른 담당자에게 인계 해놓고 경찰서를 떠나기로 했다. 


하늘이 새까맣게 변해 가로등으로 연결된 희미한 빛의 선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녁이 되었다.

이민형은 소림에게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 들어가라고 말하고는 자신은 다시 박호준이 살해당한 현장으로 향했다.

어수선하던 그의 주변은 새벽이 다가오자 물을 먹은 것처럼 조용했지만 여전히 주변의 분위기는 불쾌하게 꿀렁대고 있었다.


이민형이 현장에 도착해 폴리스 라인을 넘으려고 몸을 틀었을 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소림 형사의 묶은 머리와 축 저친 다크서클이었다.

“안 들어 갔어?” 

“제 첫 사건인데 선배님이 혼자 다하게 맡길 수는 없습니다. 저도 뭐라도 해야죠.” 

소림은 단호하게 대답하고는 허리를 굽히고 오른손 바닥으로 가볍게 땅을 짚으며 폴리스 라인을 지나갔다. 

두 경찰관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처음 현장에 왔을 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칼을 들고 위협하던 유력한 용의자가 구금되어있는 걸 빼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눈에 띄는 아일랜드 식탁은 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얀 벽지와 잘 어울리긴 했지만 혼자 지내는 집에서 사용하기에는 사치스러운 느낌이 강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기존의 살림살이는 전부 다 정희정의 것으로 보였다. 

다만 큰방은 온전히 정희정의 방이었고, 4평 남짓한 작은 방은 옷가지와 작은 싱글침대가 놓여 방에는 문을 하나 겨우 열고 닫을 만큼의 공간 밖에 없었다. 

화장실은 하나였고 둘이 같이 지내면서 청소는 나름대로 했는지 수챗구멍에도 머리카락이 조금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화장실 선반 위에는 각자가 사용하는 물품들이 아크릴 상자에 따로 놓여있었다. 

칫솔은 기본이고 둘이 사용하는 물품이 헷갈리지 않도록 같은 화장품이나 위생도구 위에는 서로의 이름을 각자 적어 놓았다. 


“두 여자가 이렇게 안 싸우고 깔끔하게 지내기 어려울 것 같은데... 참 신기할 정도로 각자의 구역을 나눠 놨네요? 둘이 규칙을 정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자 이민형은 장갑을 낀 손으로 코팅된 종이를 팔랑 팔랑거리며 소림에게 말했다. 

“감이 좋네? 저기 TV 뒤쪽에 뭐가 꽂혀 있길래 봤더니 둘이 동거 생활에 대해서 계약한 내용이 있어 가져왔지." 

계약서는 서로의 감정을 배제하려고 한 듯, 프린터로 뽑은 뒤 서로 사인을 하고 코팅처리까지 되어 있었다. 

둘은 거실에 중앙에 나란히 서서 계약서를 훑어보았다. 


1) 정희정과 이민주는 각자의 사생활을 존중한다. 

2) ‘위험’이 닥쳤을 때,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3) 이곳에는 집주인인 정희정과 동거인인 이민주만이 출입할 수 있다. 

4) 위의 사항 중 하나라도 파기되는 경우, 이민주는 퇴거한다. 


4줄로 이루어진 문서에는 ‘위험’ 부분만 강조되어 적혀 있었다. 

한눈에 내용을 훑어본 두 형사들은 고개를 기웃거렸다. 

“선배님, 이거 아무리 친구 사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까지는 하지 않을 것 같은데.. 굳이 계약서까지 써가면서 이 불편한 동거를 둘이서 해야만 했던 이유를 다시 조사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소림은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민형에게 속삭이며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그리고 이 ‘위험’.. 아무래도 정희정이 말했던 그 스토커였겠죠? 어쩌면 그 스토커가 박호준?”

이민형은 소림의 비약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동자는 계속해서 계약서의 내용을 반복 출력하고 있었다. 


계약서에 위험에 대해서 적혀 있었고 그것에 대해서 둘은 대비를 하려고 했다. 

어쩌면 정희정 혼자만 그 위험에 대해서 대비했을 지도 모른다. 

박호준이 집에 들어와 죽어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민주가 이를 발견했다면 누구라도 소림형사처럼 박호준을 그 위협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민형은 이러한 추측이 박호준이 전달해준 내용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상기했다.

“소림 형사, 내가 박호준과 병원에서 이야기 나눴던 이야기 다 전달해 줬는데도 박호준을 위험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민형은 계약서의 내용을 완전히 머릿속에 새기고 나서 소림을 뚜렷이 처다 보며 물었다. 

소림은 질문의 의도를 찾으려고 팔짱을 끼고 한참을 생각했지만 이민형에게 어떠한 답도 내놓지 못했다. 


“답은 생각보다 쉬워. 우리가 정희정이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 건, 이민주가 아니라 박호준이었어. 만약 본인이 그 위험이라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할 이유는 전혀 없었겠지. 거기다가 정희정의 집에서 죽은 상태로 발견된 걸 보면.. 어쩌면 박호준도 그 위험으로부터 당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왜 박호준은 이 집으로 들어와야만 했을까요? CCTV를 확인해보니 이민주가 진술한 내용대로 박호준은 이 집에 혼자 먼저 들어왔습니다. 얼굴을 숨기지도 않은 것으로 보아.. 본인이 여기서 죽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소림은 중요한 보고를 빼먹었다며 말을 바로 덧붙였다.

“아 그리고 사인은 이번에도 독극물로 인한 사망입니다. 당시에 테이블 위에 녹차음료 페트병이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녹차 페트병?... 혹시 어떻게 생겼는지 좀 볼 수 있을까?” 

소림은 핸드폰에서 폴더를 찾아 손을 몇 번 휘적거리고는 그에게 사진을 건네 주었다. 

특별해 보이는 점은 없었다. 어느 편의점에서나 살 수 있는 D사의 녹차 음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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