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밤 속_붉은 점

챕터2 계속

by 김현진

아내의 깔끔한 성격 덕분에 항상 집은 깨끗했다.

다만 4년전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손수 붙였던 거실의 벽지가 뜯어지고 있는 걸 보아하니 조만간 아내가 또 다시 벽지를 직접 칠하자고 할 것만 같았다.

경찰관들이 돌아가자 아내는 안방에서 나와 아이보리 천을 덮은 소파위에 털썩 주저 앉았다.

“정말 아무 일도 없어?”

아내는 지금의 현실이 믿기지 않는 듯 재차 나에게 물었다.

나는 다시 한번 아내에게 내가 희정이를 죽여 놓고도 기억 못 할 정도로 술에 취하지 않으며,

그 날 밤에 희정이가 나의 상태에 대해서 같이 고민해줘서 고마운 마음 뿐이라고 말했다.

아내는 아무말 없이 나의 설명을 듣더니 씻고 밥을 먹어야 정신을 차릴 테니 얼른 씻고 나오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군말 없이 샤워하려고 화장실로 향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수도꼭지를 오른쪽으로 돌려 얼음장 같이 차가운 물을 맞았다.

몸이 갈기갈기 찢어져 더 이상 견딜 수 느꼈을 때,

다시 수도꼭지를 왼쪽으로 틀며 뜨겁게 흐르는 물에 생각을 녹여내려고 애를 썼다.


‘희정이와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단지 희정이가 나의 상태에 대해서 걱정해줬고 나는 희정에게 원한을 가지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형사들은 내가 마지막으로 희정이와 접촉했기에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나를 지목하고 있다.

그리고 희정이는 자신 혹은 범인에 의해서 자신이 다니는 병원 근처에서 죽었거나, 죽은 후에 발견되었다.’

여기 까지가 내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긴 생각을 하는 동안 물은 계속해서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적셨고, 뜨거운 물은 몸에 있던 수분을 더 빼앗아가 미라처럼 건조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희정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다면, 어떤 이유이든 우리와 만난 이후에 결심했을 것이다.

그날 밤 아마도 내가 보지 못했던 어떤 일 때문에 희정이는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그 뒤에 희정이는 내가 자기를 택시에 태워 보내준 후에 집으로 가지 않고 병원 근처에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나는 핸드 샤워기를 자리에 꽂은 후, 해바라기 샤워기로 바꾼 후 폭포처럼 흐르는 물속에 머리만 집어넣었다.


‘하지만 어제 내가 본 희정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한 이유가 딱히 없어 보였다.

택시기사? 아니면 희정이가 내리고 난 다음에 접근한 누군가?...'


머릿속에서 온갖 가설을 만들며 물을 아낌없이 쓰고 있는 꼴이 보기 싫었는지 아내가 소리쳤다.

“자기야!! 그만 하고 나와, 뭐 좀 먹고 속 좀 차려!”

나는 알았다고 큰 소리로 대답하고는 샤워로 노곤해진 몸을 닦고 샤워가운을 걸친 채 거실로 향했다.

하얀 속 커튼 사이로 햇살이 따스하게 들어와 검은 그림자가 스테인드 글라스처럼 빛과 어둠을 교차시켰다.

사막처럼 곳곳이 패인 황토색 마루 바닥에 빛들이 살랑살랑 일렁였다.

그 광경에 포근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일렁 일렁이 울렁 울렁으로 바뀌자, 가던 길을 멈춰 서서 속이 넘어오지 않도록 배와 목에 힘을 꽉 줬다.

“뭐하냐?”

아내는 한심한 내 모습을 경멸에 찬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잠깐 속이 안 좋아서, 내가 좋아하는 콩나물국 했네?”

자리에 앉으며 아내에게 태연한척 말을 걸었다.

커튼이 처진 창문 옆사이로 놓인 하얀 원형 식탁위에는 붉은 고추를 썰어 넣어 칼칼한 콩나물 국과, 따뜻한 밥, 그리고 스팸과 계란이 놓여있었다.

긴장 때문인지 허기가 졌던 나는 잘 먹겠다는 말한마디 없이, 허겁지겁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체하니까 천천히 먹으라는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콩나물국까지 들이 키고 나서야 속이 울렁임을 멈췄다.


내가 정신없이 국으로 식사를 마무리하는 동안 아내는 다른 식기들을 정리하고 내가 먹던 약을 챙겨 왔다.

“약 먹어, 안 그래도 당신 약 때문에 정신과에서 술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못나가게 말릴 걸....”

아내는 이 모든 상황이 자신의 잘못인 양 울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기도 알지? 나 그 친구들 없었으면 아마 대학 졸업도 못하고 자기도 만나지 못했을 거라고.

자기가 아무리 말렸어도 그 자리는 꼭 가려고 했을 거야, 그러니까 자책하지마.”

약을 삼키고 남은 식기를 싱크대로 가지고 가서 내가 설거지를 하자 아내는 거실에 앉아 말없이 TV를 봤다.


약 때문인지 입안이 쓰디 썼다.

하지만 내가 배신당한 그 순간의 기억보다는 쓰지 않았다.

사회생활이 아무리 어렵다지만 이렇게 어려울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거래처의 실수로 인해 발생된 문제를 나에게 프레임을 씌워 해코지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 날,

출근길 지하철에서 쓰러졌다.

어디서 쓰러졌는지조차 모르겠지만 병원에서 깨어났다.

회사에서는 내부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겠으니 한달간 쉬면서 정신과 진료를 받고 소견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불안 장애’


정신 감정 끝에 나온 소견서에는 내가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고,

이로 인해 일상 생활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의사 선생님은 앞으로 한 달정도는 최소한 쉬어야 하며

공황 장애의 증상도 보이고 있으니 마음을 편히 먹고 주에 한번은 진료를 보러 오라고 말했다.

진료 때마다 선생님에게 많은 이야기를 털어 놓았지만,

동아리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고 메세지로 이야기를 나누며 위로를 받는 편이 나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진심으로 나를 위로해주고 나에게 공감해주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한 달이나 쉴 수 있는 신의 직장에 다닌다고 나에게 장난을 쳐도 받아 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재영이가 모임에 초대할 때 까지만 해도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낼 거라고 들떠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에 대한 불신과 상처만이 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잡념이 가득한 채로 설거지를 하다보니 싱크대에 유리컵을 꽝 하고 떨어뜨렸다.

싱크대와 유리는 만나 북소리처럼 크게 꽈앙하고 울렸다.

아내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나는 컵을 잠깐 떨어뜨렸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더이상 내가 치는 사고들에 대해서 듣기 싫은 건지 아내는 TV의 볼륨을 더 높였다.

마지막으로 떨어뜨린 유리컵을 집어 들어 컵들이 놓인 건조대의 상단에 놓았다.

아침에 있었던 해프닝에 대해서 와이프와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눈치를 보며 방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 입고는 침대위에 누웠다.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의 바탕화면은 시시각각 다른 메세지로 덮여지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그들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말을 꺼내는 순간부터 경찰이 무엇을 물어봤으며, 희정이는 왜 죽었는지, 누가 죽인 건지 등등..

끝없이 질문이 나의 정신과 육체를 물어 뜯을 것이기에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았다.

얼마지나지 않아 약기운에 몽롱한 기분이 들자 한숨 더 자고 일어나야겠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잠든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채 그렇게 나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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