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의 뜻을 품고 토익 공부를 결심했었다. 하나, 나 자신에게 집중하기 위해서. 둘, 아이들에게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퇴근해 보니 현관 앞에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한 토익 책이 도착해 있었다.
택배 상자에서 문제집을 꺼내어 거실 책상에 올려두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아이들에게 선포했다. "엄마가 토익 시험을 접수했어. 한 달 후에 시험을 볼 거야. 오늘부터 공부를 시작할 거야. 엄마는 엄마 공부하느라 바쁘니까 너희들은 각자 알아서 너희들 일을 하도록 해. 오케이?" 아이들이 물었다. "갑자기 왜에?" 앗. 이 물음에 대해 무엇이라 대답할지 생각을 안 해보았는데.. "영어를 못해서" 급조한 대답을 얼렁뚱땅하고 학교에서는 별일 없었는지로 대화 주제를 넘겼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 책상에 자리 잡고 앉았다.
일단 심호흡 한번 하고 책표지를 넘겼다. 토익시험 소개글부터 차례대로 살펴보았다.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인지 시험 형태가 달라져 있었다. 새로운 유형이 추가된 것이었다. LC에서는 3명 이상의 화자가 등장하기도 하고, 도표나 그림을 보면서 대화문을 듣고 문제를 푼다든지, 대화 중에 등장하는 화자의 특정 문장이 어떤 의도인지를 묻는다든지. RC에서는 주어진 문장이 지문의 어느 위치에 들어가는지, 3개의 지문을 읽고 5개의 문항을 푼다든지, 특정문장의 단어와 문맥 상 같은 뜻의 단어를 찾으라든지. 나에게 더 어렵게 변해있었다. 아이코, 이를 어쩌나 하면서 뒷장을 넘겼다. Day1부터 Day20까지 총 20일 코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음.. 20일간 책에서 제시한 코스로 공부하고 나머지 열흘 동안 복습하고 나서 시험을 보러 가면 되겠군.
연필을 집어 들었다. 아이들이 안 쓰는 공책을 책꽂이에서 꺼내왔다. 단어 외우는 연습장으로 쓰려고.
자, 오늘은 첫날이니까 Day1을 시작해 보자. LC부터 하자. 문제집 상단의 QR코드를 찍어서 음성파일을 play 했다. 헉.. 뭐라는 거지? 왜 이렇게 빨리 말하지? 발음에, 연음에, 어휘 뜻도 모르겠고... 가장 쉬운 PART1부터 이렇게 헤매면 안 되는데.. 책꽂이로 다시 갔다. 아이들이 학교 앞에서 받아 온 학원홍보 미니공책을 한 권 꺼내왔다. 외울 단어를 적으려고. 정신을 부여잡고 계속 반복해서 들었다. 들어야 된다. 들려야 된다. 어찌어찌 LC의 Day1을 마무리했다. 힘들었다. 너무 힘들었다. 이렇게 집중해서 듣는 게 몇 년 만인가. 20년 만. 그래 당연한 현상이야. 애써 나를 다독이며 RC Day1 페이지를 펼쳤다. 오 마이 갓. 이건 또 뭐지. 너무 낯설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게 없단 말인가. 작은 무엇이라도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렇게 하나도 남김없이 깨끗할 수 있는 건가.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고 가까스로 RC Day1을 끝냈다. 총 2시간 30분이 걸렸다.
끝내고 나니 어깨와 목이 엄청 아팠다.
너무 긴장했는지 너무 집중을 한 건지.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심각한 나의 수준을 마주하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었었다. 아.. 과연 한 달 도전을 이어갈 수 있을까. 왜 시작했을까. 미쳤어. 미쳤어. 좀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아.. 막막하다..
아니야!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포기하기 위한 변명거리를 만들기 위함이야. 이런 생각을 아예 하지 말자. 그냥 하자. 해야 한다. 딴생각 말고 피곤하니 어서 자자.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고, 꿈도 꾸지 않고 죽은 듯이 잠을 잤다.
다음날 저녁 8시 30분.
책상에 앉았다. LC Day2를 펼쳤다. 어제처럼 LC와 RC의 Day2를 끝내자. 20일 동안 진도 나가고 10일 동안 하루에 2개씩 잡아서 복습을 하면 된다. 이렇게 순탄하게 흘러갈 줄 알았는데.. 어제보다 더 미치도록 안 들리고, 모르는 게 많았다. 내가 토익을 공부하는 동안, 아이는 학교 문제집 풀고 쉬고, 학원 숙제하고 쉬고, 씻고 쉬고, 책 읽고 먼저 잔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11시가 되었다. LC의 Day2는 마쳤지만, RC의 Day2는 중간까지 밖에 못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이미 얘들은 잠자리에 들었고, 나도 자고 싶어졌다. 너무 피곤했고 힘이 들어서.
'공부가 매우 힘들구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 공부가 이렇게 힘든 것이었어. 나의 학창 시절, 취준생 시절. 공부하면서 정말 힘들었었지. 지금 우리 아이들도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겠구나. 우리 아이들이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구나. 한 달 도전 공부를 하면서도 나는 이처럼 마음의 부담이 크다. 공부를 하든 안 하든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그 부담감을 비워낼 수가 없다. 공부를 하는 동안도 그렇다. 내 맘 같지가 않다. 내 뜻대로 안 된다. 잘하고 싶은데 잘 안된다. 듣고 싶은데 안 들리고 문법과 어휘를 이해하고 암기하고 싶은데 그래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쓰고 외우고 있는데 머릿속에 자리 잡아 앉혀놓기가 쉽지 않았다. 공부를 오랜만에 해보니 심적부담과 고통이너무나 생생히 다가왔다.
그런데 그동안 나는 아이들에게 어떠했는가.
옆에서 힘이 되어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더 힘들게 하고 있었다. 공부하느라 힘든 아이의 마음, 부담과 걱정을 느끼고 있는 상태를 진심으로 공감해 주지 못했다. 아이가 공부하기 싫다고 할 때 "엄마도 예전에 그렇게 공부했어. 학생이면 누구나 공부해"라고 말해버렸던 것이 미안하고 후회되었다. 너무 성의가 없었다. 마음을 함께 해주지 못했다.
"힘들었지? 힘든데도 꾹 참고 끝까지 하느라 고생했어. 우리 이삐~(토닥)" 이렇게 말해줄걸.. "맞아. 공부가 힘들어. 이 힘든 과정을 이겨내는 내공을 쌓고 있는 우리 이삐. 칭찬합니다.~" 이렇게 말했었더라면 좋았을 걸.
"조선미 박사님께서 그러시더라. <세상에 가치 있는 것 중에 고통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어. 고통스럽다는 건 네가 너 자신을 위해서 뭔가를 하고 있다는 증거야.>". "힘든 과정이지만 차곡차곡 쌓으면서 우리 이삐도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어. 성장해가고 있다는 것이지. 응원합니다. 이삐님~" 이런 대화를 나누었었야 했는데...
그나저나 내일도 할 수 있을까?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또 그만둘 구실 찾고 있는 거야? 생각을 하지 말라고. 힘들다고 생각하면 그만두고 싶어 지니까 생각을 말라고. 그냥 하는 거야! 그래,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딴생각 말고 그냥 하는 거야!